정원에서의 질문 -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김풍기 지음 / 그린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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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일까? 아니 정원에서 옛 선비들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 저자 김풍기는 옛 사람들이 지냈던 뜰, 자신이 살았던 뜰은 몹시 작고 소박할지는 몰라도 거기서 만난 우주 삼라만상과 드넓은 사유의 지평은 장엄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제가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정원에서의 질문은 이곡(李穀), 서거정(徐居正), 안평대군, 이수광, 미수 허목(許穆), 문무자 이옥(李鈺),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박죽서(朴竹西) 등의 정원 관련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일상 언어 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단어는 정원(庭園)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 - 1587)의 용례를 제외하고 대체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들이 사용한 용어가 정원이라 설명한다. 원림(園林)은 집 안의 공간 및 집 주변의 숲을 두루 의미한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원보다 원림이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뜰이라는 단어를 전문용어로 쓸 것을 제안한다. 박은영의 말대로 마당은 평소에는 비워 두지만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곳이기에 뜰이란 단어가 적당하다.(41 페이지) 집 울타리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숲까지 연결되는 개념으로 뜰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울타리 경계 안을 지칭할 때는 유용하다. 부제인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는 허균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산다고 해도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다면 문제가 있겠는가?”가 그것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저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禁不祥)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문을 지키는 신령이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꾸짖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란 의미다. 이곡이 살았던 고려 후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시기이며 국정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의종 때 일어난 무신란을 시작으로 고려는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잃고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은 원나라가 국가의 학문으로 생각한 성리학을 한층 깊이 공부하는 한편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해 급제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곡은 어려운 사정 때문에 관직 생활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난한 이곡에게 귀거래(歸去來)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곡은 환해(宦海) 또는 환해풍파를 떠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곡이 마당 한켠에 작은 텃밭을 마련한 것은 원나라의 수도 북경에 머물던 1342년이다. 이곡은 원나라 과거인 제과(制科)는 물론 고려의 과거에도 급제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곡이 원나라에 간 것은 지원(至元)에서 지정(至正)으로 연호를 바꾼 원나라 순제를 축하하는 충혜왕의 축하 표문인 하개원표(賀改元表)를 받들고서였다.(본문에는 '하기원표賀改元表'라 나오는데 이는 오류인 듯 하다. 는 고칠 개란 글자로 이는 원나라가 원표를 바꾼 것을 반영하는 바른 단어이다.) 저자는 정원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경험이 많은 듯 하다. 저자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관심과 손길을 준다 해도 작물 성장과 결실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자연이 주는 거대한 혜택이나 재해라 말한다.(57 페이지)


이곡은 자신이 돌보는 채마밭에서 소출이 적게 나오자 천하의 작황을 근심했다. 이는 노자가 말한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불출호정지천하; 不出戶庭知天下)'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61 페이지) 서거정편에는 대마망북(代馬望北)이란 말이 나온다. 변방에서 태어난 말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같은 의미로 호마망북(胡馬望北)이란 말도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팽택령(彭澤令)으로 근무하던 중 지역을 감찰하러 온 관리를 접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봉록으로 받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이런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쓴 글이다.


서거정 만큼 귀거래를 시문으로 노래했던 사람도 드물다.(67 페이지) 서거정은 세종 대에 벼슬을 처음 시작한 이래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45년간 외직을 거치지 않고 오직 서울에서만 지낸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서거정은 한양 주변의 여러 시골에서 별서(別墅)를 운영했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은 불암산 부근이라는 양주 토산 별서와 한강 옆 광진 부근의 몽촌 별서다. 서거정에게 뜰은 권력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아름다운 자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서거정은 소나무, 대나무, 연꽃, 매화(松竹蓮梅)를 원중사영(園中四詠)으로 읊었다. 서거정은 집 뜰 안의 정자를 사가정(四佳亭), 뜰을 사가원(四佳園)으로 지칭했다. 저자에 의하면 은거(隱居)는 대체로 속세에서 바쁜 사람들의 미래 모습으로 제시된다.(77 페이지) 서거정은 자신의 집을 유거(幽居)라 표현했다. 원래 산속 깊은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귀거래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거정은 은거지와 같은 공간을 자신의 별서에 마련했다. 사람들은 별서에서 경영하는 뜰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요하다 한들 귀거래를 할 수 없기에 벼슬 속으로 은거하는 이은(吏隱)을 감행했다.('시은; 市隱'은 저잣거리에 은거하는 것으로 가장 위대한 은거라고 칭해진다.)


덕이 높고 어진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과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저자는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꾼 안평대군의 뜰을 조명한다. 저자는 고려 말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오는 청학동(靑鶴洞)이 무신의 난이 가져온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지식인들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면 안평대군을 비롯한 그 주변의 문인들에게 무릉도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는다. 안평대군에게 비해당(匪懈堂)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의 대체물로 보인다. 비해당은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내린 당호다. 비해(匪懈)는 시경과 장재의 서명에 나오는 이름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뜰에 꽃과 나무를 심고 귀한 식물도 사이사이에 넣어 비해당 뜰이 저절로 차별화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96 페이지) 안평대군이 가장 친애했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끝내 지켜내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를 보자.“손수 심은 오동나무/ 봄이 되자 푸른 잎 가지런하다/ 언제나 완전히 자라서/ 가지 위에 봉황새 와서 깃들려나,“...


특별히 정치적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안평대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거나 안평대군이 자신의 능력을 활짝 펴는 날을 기대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98 페이지) 안평대군이 비해당 뜰에 구현한 무릉도원 혹은 이상향은 동시대의 가장 빛나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석가산(石假山) 이야기를 하자. 조선 전기 문인들의 글에 석가산 관련 기록에 제법 있다.(109 페이지) 조선 전기 문인들 중 제법 이름이 난 사람들 중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자신의 뜰에 석가산과 같은 것을 조성해 놓고 즐기는 풍조가 있었다.


시은(市隱), 귀거래(歸去來)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석가산으로 뜰을 꾸미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가산(假山)을 꾸민 기록이 있다. 명산을 오르고 바다를 보며 유서 깊은 고적을 두루 돌아봄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는 기행(紀行) 열풍이 일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 중심에 성임, 성현, 채수, 서거정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행은 천하의 대관(大觀)을 돌아보는 '수양과 풍류가 공존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석가산 조성은 집 안으로 자연을 가지고 와 자연의 정취를 그대로 즐기는 방편이었다.


걷지 못해 부득이 산수화를 모아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한 것이 석가산 조성이다. 기묘한 돌과 항아리, 주변을 흐르는 물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완벽한 자연을 구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화초와 나무들을 심어 석가산이 자연의 축소판일 뿐 아니라 완벽한 원림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116 페이지) 가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돌로 만드는 석가산, 옥을 이용하여 만드는 옥가산, 나무뿌리를 이용하여 만드는 목가산 등이다.(박경자의 조선 시대 석가산 연구라는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석가산 조성은 대체로 도선(道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보였다. 무릉도원은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동굴을 지나야 만날 수있거니와 괴석문화와 관련을 가진 석가산은 이상향의 축소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127 페이지) 지봉 이수광도 뜰을 만들었다. 그의 당호는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이다. 겨우 바람과 비를 가린다는 의미의 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외가쪽 선조(先祖) 유관(柳寬)의 청백리로서의 면모를 함축한다.


이수광은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지방관을 끝내고 잠시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이수광이 계축옥사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택한 은거지가 비우당이다. 이수광은 비우당 앞뜰을 동원이라 칭했다. 작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작은 공간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서책이 있었고 문자를 통해 내가 여행한 옛 성현들의 정신세계를 정리하거나 새롭게 펼쳐낼 수 있었다. 들뢰즈는 이를 앉아서 유목하기로 규정했다. 이수광의 동서는 허균이다. 엄청난 장서가였던 허균의 책이 역모로 죽은 뒤 이수광에게 전해졌다.


이수광은 허균의 동서였기에 허균이 이이첨 권력에 협력하면서 승승장구할 때 협력할 만도 했지만 은거를 택했다. 지봉(芝峯)은 비우당 부근의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다.


저자는 꼬장꼬장하고 근엄하기 그지없었던 미수의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한 글을 발견한 것을 뜻밖이라고 설명한다. 미수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기였다. 미수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중년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미수가 경기도 연천에 자리를 잡은 시기는 부친 복상(服喪)에 참여한 시기로 보인다. 미수는 16332월 장례를 치른 후 3년상을 충실히 바쳤다. 복상이 끝난 이듬해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12월 강원도 영동을 기착지로 해 피난했다. 이 때로부터 약 10여년을 떠돌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우거(寓居)하다가 52세 때인 164612월 연천으로 돌아왔다.


미수가 삼척부사를 사직하고 연천으로 돌아온 것은 68세 때인 1662년이다. 미수는 이듬해인 1663년 십청원기라는 글을 썼다. 십청원은 미수의 뜰 이름이다. 전나무, 측백나무, 박달나무, 비자, 노송, 만송, 황죽, 두충 등은 그가 십청원에 심은 가지가 길고 잎이 푸른 것들이다. 예송논쟁에서 미수는 윤휴와 함께 3년상을 주장했다. 십청원기를 쓴 것은 예송논쟁 당시 미수가 지니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그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은 데 따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미수는 산수유람을 좋아하지만 늙어 그것을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봉우리와 고개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풀과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미수는 천하의 산수를 모아 놓은 석가산이 있는 뜰에서 꽃의 영고(榮枯)를 보며 차라리 늘 푸른 나무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미수의 뜰에는 나무, 풀 외에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다. 운은행(雲銀行), 녹나무, 풍향, 오동나무, 매화, 정향, 모란, 작약, 사간(射干), 파초, 석창포, 국화... 미수는 강회백의 정당매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미수는 용주 조경에게서 대년누자를, 한산옹 송석호에게서 대년매화를 받아 뜰에 심었다. 밑둥이 오래 묵은 매화를 대년매화라 하고 노란 꽃술에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대년누자라 한다.


미수는 푸른 꽃받침으로 피는 청악매(靑萼梅)를 좋아했다.(은 꽃받침 악이다.) 미수가 살았던 연천은 미수 외에 사대부라고는 누구도 살지 않았던 곳이다. 미수는 연천에서 20년을 살며 느낀 숲속 생활의 흥취를 열 가지로 정리했다


1) 3월에 산꽃이 만발하면 바위 모퉁이에서 산새들이 서로 지저귀는 것. 2) 숲이 깊어 해가 늦게 떠서 그늘진 벼랑으로 간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것. 3) 새벽녘 해가 뜰 때 첩첩한 산 쪽으로 맑은 노을이 드리운 것. 4) 비 그친 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5) 비가 개고 앞 개울에 물이 불어나면 낚시터로 걸어나가 낚시줄을 손질하는 것. 6) 시내 바람이 비를 불러오거나 떨어지는 저녁 햇살이 산을 감싸는 것. 7) 저물녘 산 기운이 더욱 아름답고 숲 너머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만들어내는 어슴푸레한 빛. 8) 달밤에 움직이는 뭇 것들이 모두 고요해지면 홀로 앉아 숲 그림자가 춤추는 것을 감상하는 것. 9) 가을날 해 저문 골짜기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단풍 든 붉은 나무는 천 겹으로 서 있는 것. 10) 쌓인 눈이 온 산에 가득한데 시냇가 울창한 소나무는 푸른빛으로 사랑스러운 것.


문무자(文無子) 이옥은 소품문을 쓰지 말라는 정조(正祖)의 어명을 어겨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옥이 만년에 터를 잡고 여생을 마치려 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와룡산 기슭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구절을 좋아했다. 이옥도 도연명의 시문을 읽고 자신의 뜰에 도연명의 문학적 풍경을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표현하는 시대였다.


이옥의 글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이옥은 자칫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죄인이 될 수 있을 천문, 지리, 인간, 성리학이 아닌 집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한 자연 속 삼라만상에 눈을 돌렸다. 이는 그가 평생 관심을 기지고 써 왔던 소품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천수경(千壽慶; ? - 1818)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여항(閭巷)은 도시의 좁고 굽은 골목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수경은 시사(詩社)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이 그것이다. 여항문학의 주요 구성원들은 중인(中人)과 서얼(庶孼)들이다. 18세기 전반 여항문학인들은 주로 한양 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의 서쪽에 해당하기에 서촌(西村)이라 했지만 옥류동(玉流洞), 필운대(弼雲臺) 등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중심으로 다르게 칭하기도 한다.


중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굳이 여항인이라고 하는 것은 중인들과 서얼들이 함께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40 페이지) 우리 문학사에서 여항인이 부상(浮上)한 것은 17세기 최기남을 중심으로 하는 삼청시사(三淸詩社)부터다. 최기남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 집안의 궁노 출신으로 시를 짓는 능력 때문에 당대 양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뿐 아니라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천수경은 송석원 시사를 이끌었다. 옥류동 계곡이 처음부터 중인들의 터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임병(壬丙) 양란 이후 장동김문(壯洞金門)으로 알려진 김상헌 집안이 터를 잡고 살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친의 눈병 치료를 위해 샘물이 좋은 옥류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천수경의 뜰은 많은 벗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멋진 글을 낭송하면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살롱인 셈이었다. 송석원 시사의 범례에 글로 모이고 신의로 맺는다(회이문사 결이신의; 會以文詞 結以信義)란 구절이 있다. 이이엄(而已广) 또는 공공자(空空子) 장혼(張混)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뜰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문인이다. 그는 마침내 작은 뜰 하나를 만들었다. 천수경이 송석원 시사의 맹주(盟主)였다면 장혼은 송석원시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막후 실세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혼은 누리고 싶은 청복(淸福) 여덟 가지를 꼽았다. 그중 하나가 계곡 한 구역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꽃과 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즐기는 것이다. 이이엄은 장혼의 호이기도 하고 그의 당호이기도 하다. 이이(而已)는 뿐이다, 그만이다라는 의미이고 엄(广)은 집을 의미한다.


혼자 지낼 때에는 헌 거문고를 만지고 고서를 뒤적이면서 그 사이에서 생활할 뿐이고, 생각이 나면 나가서 산속을 거닐 뿐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차리라 하고 시를 읊을 뿐이고, 흥이 나면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물을 마실 뿐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과 눈 오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등 그윽한 거처의 신비한 정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 어렵거니와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혼자 즐기다가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 이룰 뿐이다. 운수나 목숨의 차이는 나의 천명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이이(而已)’라고 명명한다...“란 글을 보면 이이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박죽서(朴竹西)19세기를 살았던 여성 시인이다. 그는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이끌었다. 저자는 박죽서의 뜰을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뜰이라 표현했다. 유박(柳璞, 1730~1787)은 꽃에 미친 선비로 불리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순서는 여암 신경준편이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은 전라도 순창을 근거지로 삼아 한양과 경기의 여러 지역에서 지내며 관직 생활 및 저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신경준의 뜰은 순원(淳園)이라 불렸다. 내게 신경준은 지리학자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산수고문헌비고<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지리서다.


신경준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란 말을 했다.


'정원에서의 질문은 저자 자신의 정원 및 꽃, 나무 등에 관한 경험이 바탕을 이루는 좋은 책이다. 정원에서의 질문을 통해 새롭게 만난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그를 비해당(匪懈堂)과 연결지어 이야기했을뿐 정원 관련 부분을 반영해 해설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점은 송석도인 천수경(千壽慶)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바이다. 안평대군, 천수경 공히 서촌에서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이엄 장혼 역시 그렇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반영해 해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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