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중 지역 강안학을 열다, 성주 한강 정구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시리즈 9
김학수 지음 / 예문서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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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 - 1620)의 본관은 청주다. 청주의 옛 이름은 서원(西原)이었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지만 본디 그의 집안은 서울에 터전을 둔 전형적인 경화사대부였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몇 십 리에 지나지 않는 칠곡의 사양정사 지경재(持敬齋)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동선은 퍽 광범위했다. 한강정사는 한강이 건립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한강을 눈여겨 본 인물들 중 율곡 이이(1536 - 1584), 우계 성혼(1535 - 1598)을 빼놓을 수 없다. 한강이 초당을 짓고 생활하던 회연(檜淵)에 한강 사후 회연서원이 건립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공부에 몰두하기 위해 회연으로 온 한강은 회연초당의 뜰에 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했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무(武)는 주희의 은거지였던 중국 복건성의 무이구곡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들 중 주자를 본받아 구곡을 경영한 대표 사례는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등이다. 물론 한강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지는 않았다.(屹은 산 우뚝 솟을 흘이다.) 성주 회연서원의 옥설헌(玉雪軒), 망운암(望雲庵), 불괴침(不愧寢) 등의 액자를 쓴 사람이 미수 허목이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의 수제자다. 여헌(旅軒)은 그를 한강의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했고 최향경은 가장 가까이서 스승의 미언(微言; 넌지시 하는 말, 뜻 깊은 말)을 들은 인물로 칭송했다. 


한강 신도비명은 상촌 신흠이 지었다. 한강언행록에 완폭정(翫瀑亭)이 나온다.(翫은 구경할 완이다.) 무흘은 워낙 험한 벽지(僻地)여서 손님들의 방문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수는 한강의 고제(高弟)였다.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를 이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영남은 낙동강 동쪽을 강좌(江左), 서쪽을 강우(江右)로 표현했다. 경북 지역이 강좌, 경남 지역이 강우에 해당한다. 한강은 1563년 퇴계를 찾아가 배웠고 1566년 남명을 찾아가 배웠다. 


한강은 바다처럼 넓고(海闊) 산처럼 우뚝한(山高) 기상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용화범주(龍華泛舟)는 친교 뱃놀이 모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불천위(不遷位)에도 등급이 있다는 점이다. 나라에서 지정하는 국불천위, 사림에서 지정하는 사림불천위, 한 고을에서만 통하는 향불천위, 도에서 통하는 도불천위 등으로 나뉘는 것이다. 종묘의 경우 정전이 사대부 가문의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다.


한강은 국불천위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술을 올리는 절차가 헌례(獻禮)다. 초헌, 아헌, 종헌으로 나뉜다. 헌작(獻爵; 술잔을 높이 드는 것) 후 구운 고기인 적(炙; 구운 고기)을 바친다. 술을 드렸으니 안주를 드시라는 의미다. 초헌 시에는 육적(肉炙; 돼지 고기)을 쓴다. 삽시정저(?匙正箸)는 첨작 후 주부가 메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메 그릇의 중앙에 꽂는 절차를 말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이르는 말이다. 갱(羹)은 제사에 쓰는 국을 말한다. 아헌 때에는 계적(鷄炙)을, 종헌 때에는 어적(魚炙)을 쓴다. 한강의 학문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지만 이론과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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