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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 -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김문식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6년 6월
평점 :
한국고전번역원의 ‘사필(史筆)’은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재상은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몰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관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백년 뒤까지 남게 할 수도 있고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관과 재상이 생전과 사후의 권한을 나누어 가진 것(본문 311 페이지)이라는 말을 했다. 사관의 역할을 잘 나타낸 말이다.
사관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남겨야 했다. 사관은 임금이 공식적으로 거둥하는 행사나 신하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밤낮없이 배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또한 수없이 많은 보고 사안을 검토하여 공식 사초인 시정기로 정리해야 했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관은 한 치의 치우침도 없어야 했기에 늘 직필을 견지하고 곡필을 경계했을 것이다.
사관은 화(禍)를 입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다.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하는 재앙이었다. 이 사화는 1498년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던 김일손(金馹孫) 등 영남 사림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서얼(庶孼)이 차별을 받은 데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이 서얼 출신이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당시 사관은 간신의 전형으로 유자광을 지목했다.
사초(史草)로 인해 화를 입기도 했던 조선의 사관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대로 기록하기가 어려웠을 것임에도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관은 개인적으로 사초의 초고나 부본을 집 안에 보관하기도 했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한다. 무오사화 이후인 연산군 12년에 가장사초를 만들지 말라는 전교가 내려져 원칙적으로 가장사초를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관은 때로 임금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원으로서의 역할을 맡아 국정 운영에 한 몫을 했다. 사관은 상참(常參), 경연(經筵), 차대(次對), 윤대(輪對) 등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다. 승정원 우사당 뒤편 북쪽에 곽방(槨防)이라는 작은 방이 있었다. 사초를 간직하는 장소로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공식 사초인 시정기는 정본 외에 부본인 비초(飛草)를 만들어 두었다. 비초는 초서로 날리듯 흘려 쓴 기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문서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사론으로 기록하여 시정기로 작성해 두는 일은 사관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고에 보관한 서적을 햇빛에 말리는 포쇄(暴?)와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오는 고출(考出)도 한림이 맡았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실록은 사관의 투철한 소명 의식과 꼼꼼한 기록 정신에 성실한 근무 태도가 더해져 탄생한 것이다. 좌사(左史)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일을 기록했다. 사관은 귀에 붓을 꽂은 자<이필자; 珥筆者>라 불렸다.
사관의 입시(入侍) 문제와 제반 규정 등은 임금과 신하들의 오랜 논의 과정 끝에 정비되었다. 사관과 관련한 제반 규례의 성립 과정은 조선 관료 사회 구성원들의 역사 의식이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림이 되기 위해서 재주<재; 才>, 학문<학; 學>, 식견<식; 識>을 겸비해야 했다. 새로 한림에 임명되어 나온 뒤 연회를 베푸는 것을 허참례(許參禮)라 했고 50일이 지나서 또 연회를 베푸는 것을 면신례(免新禮)라 했다. 그 중간이 연회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했다.
시정기의 작성을 전담했던 하번(下番) 검열에게는 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 하번 검열은 상번 검열의 허락 없이는 궐내의 근무지를 비울 수 없었고 평소 예문관에 입직(入直)하는 상번 한림이 혹 하번 한림이 임직하고 있는 승정원 우사당에 오면 하번은 재빨리 몸을 피해 옆에 붙은 작은 협방(夾房)으로 피해야 했다. 하번은 그곳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고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될 정도였다.
실록 편찬은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일뿐 아니라 새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네 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의 춘추관, 무주 적상산,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평창 오대산의 다섯 곳에 사고를 두고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그곳이 궁궐 안의 춘추관 실록각이든 태백산 사고든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태종 때 태조실록이 완성된 이후 임금들은 끊임없이 이미 출간된 실록을 열람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록 편찬을 위해 작성한 사초도 열람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문제의 사초에서 발췌해서 올린 일부 내용만을 보았다. 실록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당대의 중요한 일들은 그 자체로 국정 보고서, 행정 지침서, 행사 보고서의 역할도 하였다. 임금이 마음대로 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나랏일을 비롯하여 관직 제도의 조정이나 지방 행정 구역의 설치나 혁파, 형정(刑政), 도량형의 통일 등 국내의 정사 전반에 관한 선례가 필요할 때면 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를 고출이라 한다. 선대 임금의 훌륭한 통치 선례를 실록에서 뽑아 통치의 참고서로 활용하기도 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편찬하면서 실록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찾기도 했다. 국왕의 즉위, 국장(國葬), 복제(服制), 제향(祭享) 등 중요 국가 의례와 관련하여 선례를 확인해야 할 경우에도 반드시 실록을 고출하였다.
사필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이라는 의미로 기록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과 운명을 같이 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서울로 옮겼다.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적상산본은 창경궁의 이왕직 도서관으로, 오대산본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다. 오대산본은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74책만 겨우 남게 되었다.
일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편찬했다. 이에 두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던 실록을 영인(影印)하여 처음 공개한 것도 일제다. 이 책에서 만나는 단어들의 목록을 보면 참으로 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루원(待漏院), 시정기(時政記), 견감(蠲減), 반원와철(攀轅臥轍), 승전색(承傳色), 주묵사(朱墨史), 해괴제(解怪祭), 축수재(祝壽齋), 사옹원(司饔院), 배지(陪持), 변장(邊將), 응사(鷹師), 피전(避殿), 철악(撤樂), 지제교(知製敎), 늠료, 한림(翰林), 세초(歲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