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가 만든 세계 아시아의 미 (Asian beauty) 12
조규희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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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희의 '산수화가 만든 세계'는 특별한 위상을 지녀온 산수화가 만든 동아시아 사회를 문화사적으로 탐구한 결과물이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한 화가가 자신이 그릴 풍경의 대상으로 어떤 장소를 택할 때 그는 자연에서 자기가 발견한 것을 선택할 뿐 아니라 재구성한다는 말을 했다. 동아시아 산수화론의 핵심 이론이 와유론(臥遊論)이다. 군자는 산수를 사랑해 머물고 싶지만 현실적 의무 때문에 산수화에 마음을 의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에 대한 감탄은 보편적이지만 수준 높은 산수화는 그림을 아는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격조 높은 미적 대상이라는 말을 전한다. 즉 산수의 아름다움은 보편적 미로서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산수화 감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하고 싶은 말은 산수를 감상의 대상이 아닌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산수화처럼 산수도 아는 만큼 차원 있게 파악하고 논할 수 있으리라.

 

어떻든 저자는 산수미는 산수화와의 지속적 대화를 통해 재형성되는 관념이라는 말을 한다. 뛰어난 예술작품이 실제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61 페이지) 이를 보며 재인폭포의 지질을 떠올린다. 정교한 지질이론이 재인폭포를 깊이 있고 다채롭게 대하게 한다고. 위의 견해는 그림을 효과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발전한 환영(幻影)주의의 산물로 간주한 곰브리치의 견해와 상반된다.

 

미술사학자 키스 먹시(Keith Moxey; 1940 - )는 화가는 자연을 결코 직접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연이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방식의 흔적들에 입각해 자연을 대한다고 말했다. 산수화는 순수한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적 코드를 지닌 상징이라는 의미다. 흥미로운 점은 고원(高遠)의 거비파(巨碑派) 산수화와 평원(平遠) 산수화의 대비다.

 

알프레다 머크(Alfreda Murck)는 신법에 반대하던 구법당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송적(宋迪)의 소상팔경도에서 평사낙안의 평과 원포귀범의 원이 만난 평원(平遠)에 주목했다. 평원이 그것이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던 동정호(洞庭湖)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만나는 지점의 아름다운 여덟 풍경을 이른다. 왕안석이 신법파였다면 소동파는 구법파였다. 왕안석은 신종(神宗; 재위 1067 - 1085)의 재가를 얻어 국가 재정 안정, 국방 강화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신종의 총애를 받은 곽희가 그린 조춘도(早春圖)는 거비파 또는 기념비적 산수화 그림을 잘 보여준다. 연천 장남 고랑포구 일대의 아름다운 여덟 경치인 고호팔경(皐湖八景)은 어떤가? 평사낙안(平沙落雁)이 있고,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없지만 석포귀범(石浦歸帆)이 있다. 거비파와 다르게 가을이나 겨울의 저녁 무렵 풍경을 주로 그린 소상팔경도처럼 고호팔경도 저녁 무렵의 풍경이 주되게 반영되었다.

 

소상팔경도 이후 팔경(선정)이 뒤를 이었다. 고려에서 송적의 소상팔경도가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때다. 명종은 의종을 폐위한 무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임금이다. 이제현은 소상팔경시와 송도팔경시를 지었다. 전후팔경을 읊은 이제현은 후팔경에 장단석벽(長湍石壁)과 박연폭포 등을 포함시켰다. 예성강은 서강월정(西江月艇; 전팔경), 서강풍설(西江風雪; 후팔경) 등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단(李旦)은 송도팔경은 옛 노래임을 선언하는 차원에서 신도팔경도 병풍을 제작했다. 그러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즉위한 정종은 다음 해 개경 천도를 단행했다. 저자의 주장은 팔경도는 정치적 목적의 장치라는 점이다. 세종이 총애했던 안견은 사시팔경도 제작을 주도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자 김창협, 김창흡 형제는 출사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형제는 서인이 재집권한 1694년의 갑술환국 이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강학을 재개했다. 김창흡의 수제자로 영조 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된 이병연은 1696년 겨울 동생 이병성과 함께 석실서원에 들어섰다. 이병연은 명산대첩을 찾아 사색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는 스승 김창흡의 문예론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시인이었다.

 

이병연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의 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 해 8월 설악산에서 은거하던 스승 김창흡과 함께 마하연에서 비로봉으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1712년에는 장동에 이웃해 살던 화가 정선을 초청해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김창흡의 호는 삼연(三淵)이다. 이는 그가 머물던 장동 김씨의 별서지인 삼부연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창흡의 문인들에 의해 금강산 유람이 촉발된 후 18세기 후반이 되자 금강산 유람은 속되고 악한 일로 여겨질 정도로 열풍이 되었다.

 

강세황은 사람들이 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산을 유람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아취 있는 일이지만 자신은 이런 세태가 싫어 금강산 유람을 가장 속악한 것으로 여긴다고까지 했댜. 김창흡의 문예론에 영향을 받은 서인계 벌열 가문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금강산 유람이 강세황의 시대에는 속된 행위로 간주될 만큼 돈만 있으면 꼭 한 번 탐방하고 싶은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대개 이러한 현상은 점차 유람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는 말로 설명된다. 그러나 실상은 늘 그곳에 존재했던 금강산의 산수미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주목받게 됐음을 말해 준다. 즉 금강산에 직접 가서 꼭 보고 싶은 특정 풍경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선은 문벌 없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송시열의 문인으로 청풍계에 세거해온 외조부 박자진의 도움으로 김창흡 문하의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김조순의 증언에 따르면 어려운 정선의 집안 사정을 잘 알던 김창집이 벼슬자리를 마련해주어 정선의 출사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송도팔경에 대한 기억을 지우며 새 도읍지 한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임을 신도팔경을 통해 말했듯 한 나라 도읍지의 팔경은 대개 통치와 관련된 특별한 경관이었다. 국왕의 은혜가 미치는 경관이었기 때문이다. 정선의 금강산 화첩에 발문을 적은 신정하는 자신만이 금강산의 명성에 이끌려 무턱대고 유람하는 호명지병(好名之病)을 면한 인물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욕구는 이 세상에서 충족되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산수화 속에서 조망된 특정 경관은 그 시점에 문화권력을 쥔 인사들의 특정 장소에 대한 정치 경제적, 사회 문화적 이해 관계와 관련된다고 덧붙인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관을 왜, 어떻게 아름답다고 하는지? 이와 같은 질문 속에서 산수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산수미는 산수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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