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왕건의 동상 - 황제제도.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노명호 지음 / 지식산업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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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임금 광종이 아버지 태조 왕건을 위해 개경에 진전(眞殿)인 봉은사를 짓고 동상(銅像)을 만들어 모셨다.(광종은 어머니 신명왕후를 위해 불일사를 창건했다. 고려 말까지 기록에 자주 등장한 봉은사는 조선 개국 후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개성의 다른 사찰들이 언급되었으나 봉은사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봉은사 태조 진전의 태조 조각상이 마전으로 옮겨질 때 봉은사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종 2년 거란이 개경을 열흘 정도 점령했을 때 태묘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달리 봉은사는 전화(戰禍)를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 현종은 봉은사 태조 진전을 대대적으로 중신(重新)했다. 고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운 태조를 신처럼 받들어 나라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1392년 고려 태조에 대한 제사를 마전군으로 옮겨 거행하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를 모신 사당(옛 앙암재)에 고려 태조묘(太祖廟)란 이름이 붙었다. 혜종, 현종, 원종, 충럴왕(8월 11일), 성종, 문종(8월 12일)을 고려 태조묘에 합제(合祭)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8월 13일 고려 태조의 동상을 마전군으로 옮겼다. 2개월 후 고려 왕조의 태묘(太廟)를 헐었다. 1397년(태조 6년) 마전에 고려의 사당을 지었다. 1423년(세종 5년) 고려 태조의 동상을 위판으로 바꾸어 제사지내게 되었다.

 

1429년(세종 11년) 고려 태조의 동상과 혜종의 소상(塑像)을 현릉 옆에 묻었다. 1992년 고려 태종 능 확장 공사 중 고려 태조 동상이 발견되었다. 발굴 과정이 아닌 공사 과정에 발견한 것이어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여러 곳이 찌그러졌다. 통천관도 많이 훼손되었다. 1997년 10월 모 신문에 일본인 한국미술사 전공자 기쿠다케 준이치 교수가 촬영한 고려 태조 동상 사진이 실렸다. 고려 태조 동상은 개성의 고려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현재는 평양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데 이어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만주 동남부의 여진과 발해 유민들을 규합해 대륙의 신흥 초강대 세력인 거란을 상대하는 동맹을 이룬 영웅이다. 고려의 칭제(稱帝)는 고려가 구심점이 되는 대거란(對契丹) 동맹에서 강력한 권위가 필요한 고려 군주의 위상에 부합한다. 고려 태조 동상은 통천관(通天冠)을 쓴 모습이다. 여진 부족들은 고려에 방물을 바치고 고려는 답례품을 하사했다.

 

여진 부족들은 고려 군주에게 황제에게 보내는 문서인 표문(表文)을 올렸다. 통천관 착용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자나 제후가 쓰는 관은 원유관(遠遊冠)이다. 통천관은 진나라 때 황제의 관으로 쓰기 시작했고 한대 이후 널리 쓰였다. 고려 태조 동상은 하단에 폭 2. 5cm의 띠를 두르고 있고 높이 10. 3cm의 오각형 금박산(金博山)을 포함하고 있다. 금박산은 도교에서 통용되는 신성한 산이다.(금동대향로에서도 박산을 볼 수 있다.)

 

원래 통천관에만 있다가 당(唐) 대부터 원유관에도 포함되었다. 구별을 위해 양(梁)의 숫자나 매미 문양의 숫자에 차등을 두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쓴 통천관의 양의 갯수는 24개다. 양은 관의 전면에서 솟아올라 뒤로 꺾이어 관의 후면에 연결되는 폭이 좁은 띠 모양의 융기된 선이다. 고려 태조 동상은 고려 임금이나 고위 대신들만이 공식적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옷, 옥대(玉帶), 가죽신 착용을 전제로 만든 착의형 나체상이다.

 

이는 실제의 사람 형상에 되도록 가깝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1203년(신종 6년) 최충헌이 봉은사의 태조 진전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 고려 태조의 착의형 나체상은 제례용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인접지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이는 고려의 토속신앙에서 유래했다. 원종 11년, 충렬왕 16년 태조 상을 소상(塑像)으로 표현한 기록이 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태조 왕건을 지칭한 소상, 주상(鑄像)은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초기 제작에 대한 전승이 희미해진 가운데 당시의 조각상 표면에 따라 소상으로 불리다가 금속 주조 부분이 노출되고 나서 주상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 태조 동상은 불상과 다르면서도 불상 같은 느낌을 준다. 광종대(代)에 태묘는 없었다. 성종대에 태묘를 건축했다. 성종 2년 박사 임노성이 송나라에서 태묘당도(太廟堂圖), 태묘당기(太廟堂記) 등을 가져와 바쳤다. 진전(眞殿)에 조각상이나 어진(御眞)을 모신 것과 달리 태묘에는 나무 위패인 목주를 모셨다.

 

진전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奉安), 향사(饗祀)하는 곳이다. 1009년 강조(康兆)가 일으킨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顯宗)이 즉위한 뒤 성종대의 화이론계 정책도 끝났다. 최대의 군사적 위협 세력인 거란을 무시하며 국초 이래로 강화해 온 대거란 군비를 축소하고, 침략군의 출발 첩보가 있어도 거란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아 국방과 외교에 일대 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송나라와의 사대관계에만 경도되었었다.

 

그들에 의해 고려의 태묘도 5묘제로 운영되었다. 현종 즉위와 함께 천하다원론자들이 정책을 주도했다. 천하다원론자들은 송(宋)이나 거란 등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나름의 소천하(小天下)라고 생각했다. 1232년(고종 19년) 6월 고려는 몽골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다.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 이던 때를 강도(江都) 시기라 한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 동상도 함께 피난했다.

 

'고려사'는 고려 태조의 진전 명칭을 봉은사 태조진전, 봉은사 진전, 효사관(孝思觀), 경명전(景命殿) 등으로 기록했다. 관(觀)에 누각이라는 의미가 있다. 건물 외형을 두고 쓴 말인 듯 하다. 고려 왕실의 최고 상징물이었던 고려 태조의 진전과 동상은 조선 왕실에게 이중의 의미를 가졌다. 옛 왕조에 대한 충성을 뿌리뽑고 조선 건국을 굳히기 위해 제거해야 할 전왕조의 1차적 정치 상징물인 한편 도의(道義)로 보면 선대가 고려의 신하였던 조선 왕실에게는 예우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저자가 2005년 개성에서 열린 개성지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 및 유적답사에 학술토론회의 남한측 사회로 참여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저자는 고려 태조와 혜종 등 7왕의 묘를 마전현여 세웠다는 조선 정종(定宗) 1년 4월의 기록을 태조묘에 합사(合祀)하던 혜종 이하의 왕들을 명목상 개별묘로 바꾸었을뿐 건물 상태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풀이한다.

 

앙암사의 고려(前朝) 태조묘는 사위사(四位祠)로 바뀌어 불린 뒤 숭의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고려 태조의 동상과 진영(眞影)은 개경 봉은사에서 마전현으로 옮겨졌다가 충북 청주 문의현으로 옮겨진 뒤 세종 대에 현릉(顯陵) 옆에 묻혔다. 저자는 고려 태조 동상을 묻은 것을 고려 왕실의 권위를 깎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고려의 태묘를 헐고 조선의 종묘를 세운 뒤 고려 태묘의 위패들과 고려 태조 동상을 작고 누추한 지방 사찰(마전현 앙암사)로 옮긴 것만으로 충분히 고려 왕실의 권위가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앙암사의 제사 대상이 8위에서 4위로 축소한 것은 이미 완전 붕괴된 고려 왕실의 권위를 새삼 깎는 차원이기보다 제례법이 정비된 결과로 본다.

 

저자는 세종대에는 고려 왕실 권위를 깎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조선 왕실이 전대 왕실에 대한 예우에 너무 야박하다는 세평을 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4위사에서 숭의전으로의 명칭 변경이 논의된 것은 문종대이지만 왕의 죽음으로 아들 단종대에 마무리되었다. 조선이 고려 태조의 동상을 묻은 것은 동상이 불교식이어서인 점과 주인공이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썼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영정은 두루마리 형태여서 말아 놓으면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지만 성인 크기의 동상은 덮어 두어도 존재를 감추기가 어려웠을 바 매장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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