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집 - 심산 한국학
홍찬유 지음 / 심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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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권우집(券宇集)은 권우 홍찬유 선생의 문집이다. 시(詩), 서(序), 기(記), 발(跋), 비문(碑文), 묘표(墓表), 잡저(雜著), 부록(附錄) 등으로 구성되었다. 짧은 시간도 다투듯 아껴 써야 한다는 의미의 촌음시경(寸陰是競)이란 휘호(揮毫)를 받은 제자 정후수 교수가 ‘책을 펴내면서’란 글을 썼다.“2005월 3월 은사 권우 선생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세상을 버렸다는 말은 연관(捐館)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책을 펴내면서’에 의하면 선생은 미좌 정기, 우정 임규 선생 문하에서 배웠고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연천 출신의 한학자로 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을 설립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좌를 개설하셨다. 미좌 정기 선생에게서 교육 받은 곳이 연천 미산의 미좌 서당이다. 미수 허목 선생께서 많은 곳을 유람한 것처럼 여러 곳을 다닌 뒤 쓴 시들이 많다. 봉황정에 올라란 작품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선생은 눌재(訥齋) 양성지의 외손이다. 송파(松坡)라는 호를 쓰기도 했던 양성지는 세조 - 성종 시기의 학자로 지리학, 역사학에 능했다.

 

가을 강 뱃놀이란 의미의 추강범주(秋江泛舟)란 글에 범범(泛泛)이란 말이 나온다. 중류범범여난수(中流泛泛與亂收)란 글로 중류에 흥겨워 어쩔 줄 모르네란 의미다. 유유범범(悠悠泛泛)이란 글이 있다. 무슨 일을 다 잡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글이다. 유(悠)는 한가하다, 멀다, (멀기에) 생각하다란 의미의 글자다. 범(泛)은 뜰 범이란 글자다. 본문에 관수(觀水)란 말이 나온다. 물을 본다는 의미이지만 단지 본다기보다 물의 속성을 배우는 것이다.

 

송언개(松偃蓋)란 말이 나온다. 소나무는 나부끼듯 일산처럼 자신을 덮어(가려)준다는 의미다. 나부낄 언이기도 하고 쉴 언이기도 하다. 언기식고(偃旗息鼓)란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군기(軍旗)를 누이고 북을 쉰다는 뜻으로 휴전(休戰)함을 이르는 말이다. 두보의 시 구절인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닦는다는 만하세병(挽河洗兵)과 같은 말이다. 반암언중신(盤巖偃仲伸)은 너럭바위는 누워 뒹굴기 알맞다는 의미다.

 

연천 한탄강에서 지은 '한탄강에 배 띄움'이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삼팔선은 누가 갈라놓은 것이며(산하유선분삼팔; 山河有線分三八)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다. 정전협정은 누가 주도한 것인가?란 의미의 글이다. 정전협정을 지칭하는 말이 용주(龍酒)다. 용주무단설일쌍(龍酒無端說一雙)에 나오는 말로 화(華)가 이(夷)를 침범하면 황룡 한 쌍을 주어야 하고 이(夷)가 화(華)를 침범하면 청주 한 잔을 주어야 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화양동을 유람하며(遊華陽洞; 유화양동)란 글을 보자. 숭정 때 벌써 중국이 망했는데 만동묘가 우리에게 무슨 아랑곳이냐 존양 대의라는 게 다 무슨 잠꼬대냐? 가짜 명나라 사람도 이젠 다 지나갔네 자기도 속았고 남도 속았다. 그때 북벌론은 더욱 우스워라.

 

선생은 연천 한탄강에서 시를 지은 데 이어 철원 고석정, 순담계곡 등에서도 시를 지었다. 연천의 명소인 재인폭포를 유람하고 쓴 재인폭포를 구경하며(관재인폭포; 觀才人瀑布)란 시도 있다. 선생은 누구보다 분단을 안타깝게 여겼다. 모름지기 남북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면(수령남북일환전; 須令南北一環全)이란 구절이 있다. 선생은 문치를 숭상하는 귀한 보배를 만인이 머금는 것이 정치에서 가장 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십청원에서 더위를 씻으며(十靑園消暑)에서 우뚝 솟은 용마산 검푸른 기운으로 가렸으나(용수차아옹취미; 龍岫嵯峨擁翠微)란 말을 했다. 비문(碑文) 가운데 미강단소 개수 비명이 눈에 띈다. 미수 허목 선생을 모신 미강서원 자리의 단소(壇所)에 대한 글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우의정 문정공 미수 허 선생은 학문은 천(天)과 인(人)을 궁구하셨고 도는 체(體)와 용(用)을 체득하셨으며 예교(禮敎)를 열어 밝혀서 나라의 맥을 굳게 지키셨으니 뚜렷이 백세의 스승이 되신 분이시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첩설(疊設)이란 말이 나온다. 한 분을 여러 서원에 모시는 일을 말한다. 서원 철폐의 기본원칙은 한 분을 가장 중요한 곳에 모시도록 하고 나머지는 철폐하는 것인데 미강서원이 철폐된 것은 소인배들이 간사한 짓을 하고 그 일을 맡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는 요지의 글이다. 선생은 단소를 설립하려는 것이 다만 제사 드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시대의 형편을 보아 가며 서원을 복원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 썼다.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주인은 있는 것, 여기는 바로 문정공의 터전이다.”란 글이 눈에 띈다. 선생은 “돌이켜 보면 시원찮은 자질로 겨우 몇 글자나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결과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감히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선생은 매양 베풀기를 좋아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 의로움이 아니면 비록 만종(萬鐘)으로 녹봉(祿俸)하여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선생의 아들 사성(思成)은 어머니 단양 우씨에 대해 선생으로 하여금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학문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있게 했다고 썼다. 아들은 부군(府君)께서 20세의 나이에 망국의 한과 신문화의 성황으로 경향 각지로 방황하다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 분야에서 남달리 뛰어난 사람)인 우정(偶丁) 임규(林圭; 1863 - 1948) 선생을 뵙고 학문의 심오함과 애국의 뜻을 승수(承受)하셨다고 썼다. 아들은 선생께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좇지 않았으며 그 묻는 것에 따라 답변을 극진히 하는데 미칠 때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부군에 대한 대체의 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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