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수의 학.예.사상 논고
윤사순 외 / 미수연구회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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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수 허목 선생은 23세 때 부친 허교의 임지인 거창으로 가 용주 조경을 만나 종유(從遊)했고 문위(文緯) 문하에서 공부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생이 되었다. 한강 선생의 조카 사위인 장현광(張顯光) 문하에도 급문(及門)했다. 32세에 인조의 아버지(정원군)를 추존하자는 박지계(朴知誡)를 처벌한 것으로 인해 인조로부터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미수는 후에 정거가 풀린 뒤에도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미수는 외조부 백호 임제를 본받아 전국 명소와 산천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미수는 56세에 처음으로 정릉(靖陵) 참봉에 제수되었다. 57세 되던 해인 효종 2년 시월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대왕이 책을 읽다가 미심(未審)한 것에 부표(付標)한 것에 대해 답하는 역이었다.

 

62세 되던 해 정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조지서(造紙署) 별좌(別坐)라는 관직을 받았다. 그해 6월 공조좌랑으로 승진했으나 사직하고 연천 구택(舊宅)으로 내려왔다. 미수는 이후 여러 차례 제수(除授)되었으나 의견만 올리고 물러나 연천으로 돌아오기를 거듭했다. 66세 때인 3월에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 4품 벼슬)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해 송시열이 정한 기해상복레가 잘못되었다고 소를 올렸다.

 

오례(誤禮)를 지적했다고 하여 9월에 삼척부사로 외보(外補)되어 시월에 부임하였다. 68세 때 가을 관직을 버리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했다. 84세 때 숙종으로부터 저택을 하사받았다. 85세에 연천으로 돌아왔다. 88세 때인 1682년(임술년) 4월(숙종 8년) 병을 얻어 연관(捐館; 집을 버렸다는 의미로 죽음을 뜻함)했다.

 

선생이 젊었을 때 광주 자봉산(紫峯山中)에서 체득한 고전(古篆) 8분체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혁명적인 업적이다. 선생의 서체는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선생은 승지 김수홍(金壽弘)과 함께 적서통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백호 윤휴(尹?)가 연천의 미수 선생 댁을 찾았던 점이 이채롭다.

 

예송 논쟁은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차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논쟁이 있었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효종이 죽자 모후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남인 계열과 서인 계열이 다투었다. 서인은 효종이 차자(次子)이니 자의대비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효종이 자차이지만 왕이 되었기에 자의대비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기해예송이라 한다.

 

갑인예송은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자의대비가 얼마의 기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다툰 사건이다.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미수와 윤휴의 예학은 당시 조선 예학의 고전적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학자들의 예론은 예학의 보편주의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예의 분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제왕가는 사서인(士庶人)과 달리 왕위 계승자에게 종법을 주게 되므로 효종이 장자의 지위에 있고 그에 대한 모후의 복(服)을 재최(齊衰)삼년으로 단정하게 된다. 재최(齋衰)는 흔히 자최(齊衰)라고도 한다. 자(齊)는 옷자락을 꿰매어 마름질한다는 뜻으로 옷의 끝단을 꿰맨 상복을 말한다.(衰; 상복 최, 쇠할 쇠)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효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차자(次子) 지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에 대한 복(服)도 기년(朞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의 고전에서는 주로 왕족 귀족들의 예를 기술하였고 이 때문에 신분적 특수성을 강조한 요소가 많았다. 고전 예악은 봉건체제와 귀족사회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예제가 신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다르게 적용된다는 관념은 당연한 추세였다.

 

따라서 신분의 귀천, 지위고하, 존비의 차례를 분별하는 것이 예제의 한 기능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천자 7묘, 제후 5묘, 대부 3묘, 사 1묘라든지 기지상(朞之喪) 달호대부(達乎大夫) 3년지상 달호천자(達乎天子)와 같은 차별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예는 서인(庶人)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또는 사(士) 이상은 반드시 예악으로 절제시키고 중서(衆庶) 백성은 반드시 법수(法守)로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 보편화되었다.

 

의례(儀禮) 상복편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상이한 많은 복제(服制) 규정들도 이러한 사회적 예학적 통념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조예제를 집대성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는 사서인의 예도 수록하긴 하였으나 그것이 신분 혹은 품계별로 정리되었고 대명집례(大明集禮)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서도 모든 전례가 황실례, 품관례, 서인례 등으로 분별되었다.

 

조선 초기에 완성된 국조오례의는 거의 전부 왕조례를 규정한 것이며 사서인의 예는 수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제왕가의 예가 사서인과 다른 고유성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가례(家禮)의 저자인 주자나 그 연구의 제일인자였던 사계 김장생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윤휴, 미수, 윤선도 등의 복제론에 이르러 절대적으로 강조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사대부 계층의 예서였던 가례를 제왕가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조선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왕조가 불교 의례를 유교식으로 대체해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인데 태종 - 세종대 제도 정비기에 미처 왕조례가 마련되지 못했던 부분에 가례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세종의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하도록 한 것이 그런 예다.

 

그래서 국조오례의의 흉례, 국휼 부분에는 특히 가례가 많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왕조를 사대부례와 동일시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수의 학문은 가학으로 축적되어 온 근기(近畿) 내지 기호(畿湖)의 학풍을 겸습(兼習)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이룬 것이다. 미수는 염락관민(濂洛關?)의 성리서 정도를 공부하던 시대에 박학을 추구한 드문 인물이다.

 

당시 박학은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속하는 잡학으로 천시되었다. 물론 미수에게는 중심 분야가 있었다. 그는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아 예악(禮樂)을 참구하면서 백가의 잡설들을 통람(通覽)하기에 발분,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 50년이었다는 말을 했다.

 

오늘의 예(禮)는 예절, 에티켓 정도의 의미이지만 당시의 예는 그런 의미는 물론 법률, 제도, 문화 일반을 두루 포괄했다. 다른 선비 같으면 벼슬 후 은퇴할 나이인 50대 중반까지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수많은 곳으로 피난, 유람, 이사하면서 학문을 했다. 미수의 생애는 50대 후반부터 타계한 해인 88세까지 노년기가 벼슬을 의욕적으로 하고 저술 역시 왕성하게 한 시기다.

 

미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전성기에 태어나 당쟁이 격렬한 시기에 남인 중에서도 청남(淸南)의 대표자로 활약하다가 타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과제인 우주론과 인성론을 논리적 분석으로 이론화한 학문이 되었으나 형이하학적 문제인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등 실학에는 이용되지 못하였다. 미수는 이에 성리학에서 탈각하여 선진유학으로 회귀하여 육경(시서역예악춘추)에서 성인의 도를 찾아 명덕(明德) 신민(新民)하는 것을 여생의 임무로 자부하였다.

 

미수는 당시 유행하던 사단칠정론이나 이기심성설 같은 공소(空疏)한 형이상학적 논쟁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고문(古文)과 고자(古字)에 탐닉했다. 미수는 윤휴와 같이 경전에 대한 과감한 고증이나 선유(先儒)의 정설에 대한 대담한 비판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물며 경전 자체를 부인하거나 장구(章句)를 개편하는 윤휴의 태도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수는 그의 과격한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심오하고 독창적인 학문 태도를 긍정 평가하기도 했다. 이점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한 송시열과 같은 맹목적 주자 추종자들과 다른 점이었다.

 

미수에 대한 평가는 당대부터 상반되게 나타났다. 그의 글에 고기(古氣)가 있어서 훌륭하며 그의 상고정신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도전으로 뒷날 실학사상의 근원이 되었다는 우호적인 설이 있는가 하면 그의 글은 시대에 맞지 않으며 그의 상고학 또한 선별적인 복고가 아닌 완전한 복고로 시대역행적인 학문태도라는 비우호적 평가도 있었다.

 

미수에 대한 근세 학계의 관심은 예론에 치우친 감이 있다. 미수의 상고학 학문 태도는 그의 도가적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히 반주자학적 의식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미수는 도가적 의식이 무위자연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선진(先秦) 고학(古學)이 후대의 유학보다 인위적인 면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상고학 정신은 선진 시대를 재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 아니라 당시 학풍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도가적 의식은 임병(壬丙)양란 이후의 사회 안정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성리학에 대한 반발 의식이었으며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묻혀 살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부친 허교(許喬)는 도가적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외조부 임제(林悌)도 반주자학적 의식을 가진 처사(處士) 시인이었다. 미수가 교유한 인물들 가운데 주자학을 신봉한 인물은 없었다. 위와 같은 배경에 의해 형성된 도가적 의식은 노장적 처사관을 수용했다. 성리학자들이 배척하는 처사 다시 말해 조수동군(鳥獸同群)하여 장저(張沮)와 걸익(傑溺)과 같은 생활을 하는 인물을 동경하고 이들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공자가 밭일을 하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보고는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였다. 자로가 장저에게 다가가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묻자 장저는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자라고 말하자 장저는 공자라면 나루터가 있는 곳도 알 것이라고 말하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은자(隱者)인 장저의 말에는 뜻을 펴기 위하여 주유열국(周遊列國)하는 공자를 비웃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자로는 다시 걸익에게 물었다. 걸익은 자로가 공자의 제자임을 알고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상이거늘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한 뒤 밭일을 계속했다.

 

자로가 돌아와 그들의 말을 고하였다. 공자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면 내가 바꾸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미수의 시 가운데 공자와 안회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 있다. “공자의 일흔 명 제자 중에서/ 어짊을 물은 이 몇몇 사람인가?/ 오직 안회란 분이 계시니/ 석달 동안을 어기지 않으셨네.” 공자의 제자라 해도 수준이나 지향점, 생각하는 바가 다 다름을 알 수 있다. 미수는 “인정은 본래 수없이 변하는 것/ 날마다 갈수록 세상일 복잡하다/ 친숙한 사람도 때로는 멀어지니,/ 언제나 똑같이 보기는 어렵다네..”란 글도 남겼다.

 

미수는 천지 자연과 인간을 같은 자리에 놓고 자연의 천태만상적 아름다움과 질서정연한 운행은 곧 인간의 글이고 그 글은 도덕과 같으니 도덕이 훌륭해지면 글도 융성해지고 도덕이 타락하면 글도 타락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미수의 대표작인 기언(記言)은 자신이 한 말을 기록한 문집으로 글을 위한 글이 아니다.

 

한영우의 연구에 따르면 미수는 자신의 학문을 고학(古學)이라 규정했다. 주자의 해석을 통해 이해되는 유학(儒學)이 아니라 육경고문을 직접 파고드는 원시유학을 말한다. 고학적 세계관에서 신화의 세계는 이상사회로 그려지고 단군의 존재는 부각되는 반면 주자학의 중화(中華)와 이융(夷戎)의 구별이나 존화주의는 배격된다.

 

상고(尙古)주의는 옛적의 문물을 숭상하여 표준·모범으로 삼는 주의를 말한다. 허목은 73세 때인 1667년(현종 8년)에 동사(東事)를 편찬했다. 이 해에 허목은 동사뿐 아니라 경설, 청사열전을 함께 저술, 편집하여 기언(記言)이라 하였다. 허목이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현종 3년에 삼척 부사를 그만 두고 5년간의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수는 73세의 고령임에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대저작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자신이 학문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수는 숙종 3년에 경설과 동사를 왕에게 바치면서 왕이 두 책을 제왕학적 교훈서로 참고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는 경설을 바치는 차문(箚文)에서 공리(功利)를 진언(進言)하는 사람을 경계하고 3대 고(古)성인의 학(學)을 따라 정치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동사의 내용을 설명하여 우리나라는 중국과 기후, 말, 풍속, 취미가 다른 방외(方外)의 별국(別)國)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단군으로부터 통일신라까지의 역사를 개관하고 칭송받아야 할 시대는 단군, 기자, 신라이며 경계해야 할 나라는 위만, 백제라 하여 경계의 기준을 전쟁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두었다. 이는 당시 군비확장 정책과 벌호(伐胡) 운동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그래서 허목은 우리나라의 풍토적 조건, 그 풍토에 맞춰 형성된 농업 조건, 인심, 풍속 그리고 역사를 헤아려 그에 순응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부국안민의 요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동사(東事)’는 기전체의 사서다. 전통적 가치관에 의하면 서화는 대체로 선비들의 여기(餘技), 말기(末技)로 취급받았다. 때로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조차 없지 않았을 만큼 폄척(貶斥)을 당하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여기에 속하는 말기(末技)로 취급되었을망정 그것에 대한 관심과 교양은 사실에 있어서는 매우 컸다.

 

소동파가 한 '퇴필여산미족진 독서만권시통신(退筆如山未足珍 讀書萬卷始通神; 몽당붓이 산처럼 쌓여도 보배로운 것이 되기에는 부족하고 만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귀신과도 통한다.)'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서화는 고도의 교양과 높은 인격성을 전제로 한다. 미수의 고전(古篆)은 어떻게 보면 된 것 같기도 하고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부적 같기도 한 신비로운 명적(名蹟)이다.

 

미수로 하여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와 고고(高古)한 문장, 기이한 전법(篆法)을 쓰게 한 근거와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선진(先秦)고문(古文)만을 숭상할뿐 한당 이하 근세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처럼 평가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은(殷)주(周) 고대의 전적과 이사(李斯)의 소전(小篆) 이전의 고문자들이다.

 

은주고대의 전적이란 고문상서를 주축으로 하는 공벽(孔壁)고문(古文: 한무제 때 공자의 구택에서 나왔다는 일련의 고문서)들이다. 소전 이전의 고문자란 과두문자를 필두로 하는 갑골, 종정(鐘鼎) 등을 말한다. 미수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고문 또는 고전으로 응수(應酬)했다.

 

허목을 사사한 성호 이익은 허목의 서첩에 발문을 붙이며 이때 일을 거론한다. “미수 선생은 매사 옛것을 좋아하여 사소한 편지나 만필이라도 과두문자의 획으로 예서를 썼다. 벌레 주둥이, 새 발톱 모양의 글씨가 완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참으로 기이하다.”

 

미수는 나는 일찍이 웅연석벽에서 돌에 새긴 이상한 글씨를 보았는데 그 글씨는 괴괴하고 기기하여 어떤 것은 내려 그었고 어떤 것은 가로 그었으며 혹은 합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등 변화가 진정 놀라웠다고 썼다.

 

미수는 그것을 기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귀신의 자취라고 단정했다. 주목할 점은 미수가 웅연석문을 감상한 이후 진(秦) 이후 나타난 서체에 대해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척주동해비는 미수 전서의 대표작이다. 미수의 유작을 가장 먼저 필사하여 정리한 사람은 선생 사후 2년인 1684년(숙종 10년) 승지와 황해 감사를 지낸 권수(權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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