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만나는 고구려 답사 길잡이 - 2012 아침독서 추천도서
윤명철 지음 / 대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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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농경문화만을 영위한 것이 아니다. 길림 이북의 초원에서는 농사와 함께 유목을 했고 삼림 지대에서는 수렵을 했다. 바다에서는 어업과 교역을 했다. 고구려는 대륙과 초원 반도와 해양을 포함하는 지중해적 성격의 대국가였다. 고구려는 다종족적, 다문화적 국가 즉 제국 지향적 국가였다. 고구려는 성(城)을 뜻하는 구루라는 말 앞에 고(高)를 붙여 고구려라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수왕 대에는 높고 아름답다, 한가운데 등의 의미를 갖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1972년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에 구려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초원의 유목민이었고 숲속의 사냥꾼이었으며 들판의 농사꾼이면서 바다를 항해하는 해양민이며 상인이었다. 주몽은 건국하자마자 송양이 다스리는 비류국을 정복하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했다.

 

고구려가 무려 700년 동안 강국으로 존속한 것은 정신력, 국가 시스템, 기술력 등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지만 직접 영향을 끼친 것은 군사력이다. 활과 긴 창을 든 채 말 위에 올라앉은 중장기병들, 고구려의 맥궁과 장창을 든 경기병들, 갑옷과 투구를 쓴 보병들이 있었다. 수나라 100만 대군을 막아낸 성은 평야에 자리한 성이었고 당 태종의 10만 친정군을 격파한 안시성은 둘레 4km에 해당하는 야산의 토성이었다.

 

고구려 성들은 일본, 유럽 등의 성들과 달랐다. 지배 계급만을 위해 좁은 면적을 강하고 화려하게 쌓은 거성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성주와 군인들, 일부 백성들이 거주하면서 행정공간, 문화공간의 기능 즉 거대 도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주위 모든 사람들이 성 안으로 대피하여 전면전을 벌였다. 모든 고구려 성은 방어 기지이자 전진의 거점이었다. 치(雉)는 평평한 성벽의 곳곳에 적을 공격하는 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성의 일부를 네모나게 돌출시켜 만든 시설물이다.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100미터 정도의 화살의 유효 사거리를 감안해 만들었다. 성가퀴는 여장(女墻), 치첩(雉堞)이라고도 한다.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중국 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수혈 받는 지역이 서역의 일부와 남쪽이었다.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 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으므로 경제 형태도 다양하고 이동성이 강했다.

 

고구려가 망하자 만주 지역의 비중 있는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매우 개방적이었고 세계 보편적이었다. 이미 주몽 시대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개마(鎧馬) 무사들이 있었다. 중무장한 철기병들이다.(鎧; 갑옷 개) 온돌은 고구려인들의 발명품으로 본다. 만주 일대에서 유적을 발굴하다가 온돌이 나오면 고구려 또는 발해 유적으로 판단한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환인이다.

 

요령성 환인현 혼강 가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 천지(天池)라는 연못이 발견되었다. 식수원이자 신앙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는 집안(集安)이다. 고구려 최대의 고분이 있는 무던 도시인 집안 지역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나 접근이 어렵고 대피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로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던 곳이다.(만주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내몽골 자치주 동쪽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런대로 교통의 요지였다. 압록강 수로를 이용해 황해로 진출하면서 해양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던 곳이다. 집안의 국내성은 천연의 배산임수의 천연 요새였다. 국내성은 몇 번 파괴되기는 했지만 427년 장수왕에 의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400년간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만든 산실이자 성장의 둥지였다. 압록강은 국내성의 국경이 아니라 궁성을 방비하던 큰 해자이며 한강처럼 수도 앞을 흐르는 강이었다.

 

집안 분지(盆地) 전체가 큰 나라의 심장 구실을 하면서 곳곳에 생명의 피를 공급해주고 머리가 되어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고 나라의 온갖 근심을 안아주던 품이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고로봉식 산성이란 포곡형으로 정상과 절벽,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하여 허약하고 부실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돋워 올려 토성화한 형태다. 국내성 동쪽 들판 한 가운데에 커다란 돌덩이가 의연히 서 있다. 장수왕이 부왕 광개토왕이 붕어(崩御)하고 2년째 되던 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다.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업적뿐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발전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 내지 좌표인 셈이다. 첫 머리에 주몽이 역사에 등장하는 과정이 신화 형태로 기록되었고 그 외 비를 세운 경위,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점령지 묘사, 영토(領土), 순수(巡狩) 사실, 수묘인(守墓人)들에 대한 기록 등을 나열했다. 1877년 비가 발견되었다. 청(淸)이 만주에 대한 봉쇄 조치를 푼 이후의 일이다. 집안은 만주족인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한 곳에 포함된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나 1928년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 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1982년 중국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장수왕이 비를 세운 데에는 옛 영토를 회복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다. 비는 장수왕의 국정 지표를 밝히는 선언문이기도 하다. 비에서 북서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릉이 있다.

 

천손(天孫) 민족을 표방한 고구려인에게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나 지하 공간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늘<천; 天>을 재현한 것이다. 성숙도를 비롯한 천계도가 그려져 있고 천조(天鳥), 새를 탄 천왕랑, 기린마(麒麟馬), 천마(天馬), 비어(飛魚) 등 하늘과 관련된 성수(聖獸)들이 집요할 정도로 다양하고 많이 표현되어 있다. 고분은 또한 고구려인들의 우주관, 역사관을 표현하고 있다. 고분 안을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고 축조 양식을 활용한 공간 분할을 시도했다.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구분했고 각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를 설정하였다.

 

그들은 주체와 대상체를 하나로 인식하는 태도를 가졌다. 인면조(人面鳥), 일각수(一角獸) 등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존재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신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그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벽화는 완벽함과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상상의 세계를 표현했고 현실 세계도 지극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으로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주제가 많고 사람들을 소재로 했을 경우에는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활이나 창 등의 무구(武具), 무사들의 마사희(馬事戱), 수박희(手拍戱), 행렬도(行列圖), 외유도(外遊圖) 등을 그렸다. 표현 소재들의 공통 특징은 정지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수렵도, 씨름도, 역사 등 현실적 주제를 화려한 색상과 거침 없는 붓으로 역동성 있게 표현했다. 인물, 꽃, 신수(神獸) 등은 대부분 움직이고 있다.

 

이는 사물과 사건은 운동한다는 인식을 반영한 결과다. 운동의 표현들은 직선이 아닌 원, 곡선, 유선형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역사(力士)마저도 곡선을 주조로 처리하여 역동성을 표현했다. 이는 고구려 문화의 역동성이 단순한 운동량의 증가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정제된 목적 지향의 성숙한 질적인 역동성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니라 문화국가였다. 무덤<총; 塚> 형태 중 위로 올라갈수록 층을 이루면서 좁아지는 구조를 궁륭식이라 한다. 집안시 외의 동쪽 외곽인 하해방촌의 모두루 무덤의 묘지명은 광개토왕비문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당시 고구려인들의 공통 인식을 알게 한다. 신의주와 맞닿은 곳이 단동(丹東)이다.

 

압록강은 국내성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동강이 평양성을, 한강이 한성을 방어하는 해자 역할을 한 것처럼. 압록강변의 군사시설은 방어와 진출이라는 2중의 목적을 실헌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성(城)에서 시작해 성에서 운명을 다한 나라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성을 뜻하는 구루에서 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고구려에게 성은 정치공간이자 생활공간, 경제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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