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 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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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수렵민족이었다. 유목민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수렵민족은 사냥을 해 먹고 살았고 때로 약탈을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유목민이 인류사에서 위대한 발명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유목민 기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양이나 소는 길들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말, 개, 낙타는 길들여야 할 뿐 아니라 훈련도 시켜야 한다. 태생적으로 수렵민은 유목민보다 더 거칠고 싸움을 잘했다.

 

유목민들은 목축(牧畜)으로 즉 가축을 길러 먹는 것으로 살았지만 고구려인들은 움직이는 짐승들을 사냥해야 했기에 더 힘들었다. 유목민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다. 유목민들은 유목과 수렵을 겸한 경우가 많아 유목수렵인이라 말해도 좋다. 유목민의 수장이 중국인에게 대우를 받은 것은 그들이 보유한 기병 때문이었다. 고구려인들은 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전투능력을 길렀다.

 

고구려인들은 정기적으로 초원으로 나아가 유목민의 가축을 몰아오거나 중국인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흉년이 들거나 사냥이 잘 되지 않을 때 그랬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도 유목민이 아니라 수렵민 출신이었다. 고구려는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할수록 힘이 강해졌다. 전쟁과 정복으로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강제 입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낙랑인, 북중국인, 동예인, 옥저인 등을 병력으로 동원한 다문화 국가였다. 고구려는 유목민들과의 동업과 전쟁을 통해 배우고 성숙해져갔다. 고구려와 유목민들은 일방적인 지배 - 피지배 관계 또는 착취 - 피착취 관계가 아니었다. 고구려는 유목과 농경의 점이지대에 위치해 두 측면을 배울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는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는 글로 시작한다. 주몽이 길을 떠났다는 것은 부여의 왕자들의 추격을 받고 도망친 것을 말한다.

 

추모왕(주몽)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의 지류인 비류수(沸流水)가에 자리 잡았다. 22세의 일이다. 고구려의 모체가 된 사건이다. 고구려 군대는 사냥을 위한 조직이나 다름 없었다. 고구려군은 야전에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냥은 가장 자연스러운 군사 훈련이었다. 고구려인들은 호전적인 한편 웃음을 즐긴 사람들이었다.

 

낙랑의 문화는 고구려의 묘제에도 큰 변화를 줬다. 낙랑이 병합된 이후 고구려에 거대한 봉토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덤의 방을 벽화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가 여기서 탄생했다. 낙랑인들은 단검이 아니라 장검을 사용했다. 고구려와 삼한인들은 처음에 청동단검을 알고 있었지만 철제장검은 몰랐다. 단검은 가까이 다가가 찔러야 하지만 장검은 더 먼 거리에서도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전투 양상이 바뀐 것이다.

 

고구려 15대왕은 미천왕(美川王)이다. 소금 장수 출신이다. 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 불리는 것은 유해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인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 진흥왕 못지 않은 영광스런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묘가 도굴되는 비운을 겪었다.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 군사에 의해 도굴된 것이다. 미천왕의 아들이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다. 고국원왕은 평양을 침입한 백제 근초고왕 군대에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전사했다. 장지가 고국원이란 들판이기에 고국원왕이라 불리는 것이다.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이 죽음으로써 고국양왕이 왕이 되었고 후에 아들 담덕이 광개토왕이 되었다.

 

광개토왕은 즉위 두 달만에 임진강 남쪽의 백제 성인 석현성을 공격했다. 광개토왕의 백부(소수림왕)와 아버지(고국양왕)은 황해도 지역의 백제의 요새를 하나 하나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백제를 잠식하려고 했다. 하지만 광개토왕은 바로 임진강 선을 돌파해 백제의 수도권으로 진격했다. 391년의 일이다.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해 39세에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 했다.

 

그는 한시도 쉴새 없이 남쪽의 한강과 북쪽의 요하(遼河) 사이를 오가며 사력을 다했고 젊은 나이에 과로로 죽었다. 414년에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왕릉비를 세웠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위치한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미터 지점에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이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는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말을 했다.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를 초래하는 나라는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 결과로 획득한 영토 확장으로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다.“ 문제는 확장한 영토를 어떻게 활용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구했다. 고구려에게 말은 아주 중요한 전쟁 병기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달의 아내 평강공주는 좋은 말을 선택하고 사육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쟁이 지속될 때 자국에서 생산된 말이 많아도 소모를 따라잡지 못했다. 고구려 내에서 유목민들이 말을 생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말을 지속적으로 유입해야 했다.

 

고구려는 말들이 자라난 원주지(原住地)와 가까운 북쪽에 목장을 만들어 현지 적응 훈련을 시켰다. 서식 환경이 다르더라도 점차 적응시키면 사망률을 줄일 수 있었다. 고구려가 유목민에게서 항상 평화적으로 말을 공급받은 것은 아니다.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고구려가 유목민으로부터 말을 가져오든 자체적으로 양육하든 관리하고 양육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초원과 인접한 고구려 북부지역에 대규모 국영목장들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유목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애썼고 이탈할 경우 습격해서라도 되돌려 놓았다. 유목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거란의 출복부는 돌궐이 심하게 착취하자 그보다 세금이 가벼운 고구려로 들어갔고 수(隋)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자 미련 없이 고구려에서 이탈했다.

 

수(隋)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唐)도 고구려 휘하의 거란이나 말갈인들을 회유해 끌어들이려는 공작을 펼쳤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수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도 거란과 말갈 등을 회유해 포섭했고 고구려는 여기에 무력으로 대응한 바 있다. 이 사건은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우려한 대로 645년 당의 고구려 침공시 돌궐 유목기병이 동원되었다. 책에는 재미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안시성 이야기다. 쿠데타로 집권해 허수아비 왕 보장왕을 세운 연개소문이 지방 성주들을 자기 사람들로 교체하는 상황에서 안시성주 양만춘은 응하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직접 안시성으로 쳐들어왔다. 성은 고구려 중앙군의 공격을 받고도 건재했다.

 

당시 고구려에는 국가보다 직속상관과 주인에게 충성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국왕에 대한 도리보다 권력을 숭배하는 풍습이 앞섰음을 말해준다. 안시성에는 출동 직전 항상 고기 음식을 배불리 먹는 특공대가 있었다. 유목 사회는 내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유목제국을 파멸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야망에 찬 유능한 새 지도자가 배태되는 산고(産苦)이기도 했다. 새로운 영웅적 지도자의 출현은 그를 구심점으로 한 강고한 단합을 가져와 더 강력한 유목국가를 만들었다.

 

유목민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최소의 손상을 주며 재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무리 속에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날 동요를 최대화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빠르고 명쾌하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살인을 하는 기술의 보유자들이었다. 그들은 냉혈하고 능수능란했다. 고구려 초기에는 사냥꾼들이 유목민들을 약탈 대상이자 사냥감으로 여겼지만 장수왕대 이후 국가 영역이 커지면서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고구려는 사냥꾼보다 농민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당나라에서 유목기병을 잘 지휘한 사람 중 설인귀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최대 전성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시기다. 그는 숱한 전설의 주인공이다. 고향이 적성 주월리고 율포리에서 그의 용마(龍馬)가 났다는 것 등이다. 설마치(薛馬馳)는 그가 말 달리는 훈련을 했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다.(’치; 馳‘는 달릴 치이다.) 설마리(雪馬里)는 그가 겨울에 눈밭을 누비며 무예를 쌓았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다.

 

청천 신유한은 ’감악산기‘에서 설인귀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를 감악산에 장사지냈고 안동도호부에 머물 적에 수차례 성묘를 했다고 썼다. 저자는 수(隋), 당(唐)이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집착한 이유가 고구려가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끊임없이 반란을 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휘하의 거란, 말갈인들에게 안전하게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었고 겨울이 되면 꼭 필요한 곡물을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고구려는 거란인과 말갈인 없이 기병 동원과 전마(戰馬)의 원활한 공급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방치하면 고구려를 떠났고 항상 적의 편에 가담해 고구려를 괴롭혔다.

 

고구려의 군주들이 다른 유목민들을 약탈하거나 제압할 때도 그들의 도움은 필요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북방 몽골 초원에는 당에 대항할 수 있는 유목제국이 사라졌다. 즉 고구려의 동업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665년 고구려 집정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무능한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터지자 고구려 휘하에 그나마 남아 있던 거란과 말갈인들이 대부분 당으로 붙었다. 고구려에게는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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