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 DMZ를 걷다 - 비무장 지대의 우리 역사를 찾아서 손안의 통일 7
최동군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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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성도 육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광개토왕이 백제의 관미성 즉 오두산성을 무너뜨릴 때 육군이 아닌 수군을 보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파주시의 옛 지명은 교하(交河)다. 임진강과 한강이 교차한다는 의미다. 교하 지방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임진강과 한강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의미다.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의미다.

 

칠중성은 임진강의 옛 이름인 칠중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강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칠중성은 148미터의 중성산에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감악산 입구의 설마리에는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감악산까지 말을 타고 와 훈련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임진강의 하류는 강폭도 넓고 깊어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나 상류쪽으로 갈수록 폭도 줄어들고 깊이도 얕아진다. 경순왕릉 바로 앞의 고랑포구를 지나면 배가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고랑포구에서 5킬로미터 정도 상류의 칠중성 앞 임진강은 개도 건널 수 있는 개울이라는 의미에서 술탄(戌灘)이라 불렸다. 칠중성은 바로 이런 이유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글로스터 대대는 한국전쟁 당시 6백여명의 병력으로 3만여명의 중공군을 상대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군 1개 대대가 궤멸되었지만 그들이 3일간 중공군을 붙잡아둔 덕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완벽히 방어할 준비를 마침으로써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황희는 뇌물 수수, 간통, 직권 남용 등 수많은 혐의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황희는 매번 세종의 무한대에 가까운 신임으로 가볍게 처벌받았고 헝식적인 파면 후 곧바로 복직되었다. 세종이 황희를 감싼 것은 황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다. 황희의 청백리 신화를 만든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이었다. 당시 명나라가 재상제를 폐지했는데 조선이 이를 따라 한다면 양반들에게는 기득권이 축소되는 것이기에 청백리 신화를 억지로 만들어 대외 선전용으로 활용했다.

 

저자는 숭의전을 고려의 종묘라고 말한다.(하지만 4왕을 모신 사당을 종묘라고 할 수는 없다.)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고려의 왕으로 즉위했다. 1392년 자신이 세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과 화령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물어보는 국서를 예문관에서 작성하게 했고 이듬해인 1393년 2월 15일이 되어서야 중국을 다녀온 사신에 의해 조선으로 하라는 재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양왕이 아니라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말은 석연치 않다. 한양이 아닌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고 조선이란 이름은 후에 얻었지만 실질적으로 새 왕조를 세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호를 조선과 화령 중에서 골라 달라고 한 것은 고려라는 이름(나라)을 버리고 새 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단지 새 이름을 늦게 재가받은 것뿐이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上; 임금)이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 동파리)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선조실록 내용이다. 선조가 피난 가는 장면인데 화석정을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는 없다. 한 개의 등촉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는 것이다. 화석정을 태워 선조의 길을 밝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아야겠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평양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는 고양 벽제와 파주 문산을 거친 후 화석정 아래쪽에 있던 임진나루를 건너 장단과 평산을 통과하는 길이다. 임진강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강이었음은 삼국 시대 이래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증명되었다.

 

북방 오랑캐의 침입이 있으면 한반도의 정권은 예외 없이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때 1차 저지선이 임진강이었다. 임진강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잃게 되는 6세기 중반부터 멸망할 때까지 약 120년간 고구려의 최남단 국경이었던 만큼 북쪽 강가에 고구려의 평지성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들어서 있다.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이 복원되어 있다.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대규모 병력이 개성에서 서울로 이동할 때 지금은 최단 코스가 임진각 인근의 통일대교와 임진강 철교를 건너 문산을 거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임진강을 건너야 하는 부담 때문에 약 15킬로미터를 동쪽으로 우회하여 호로고루나 칠중성 앞의 술탄을 건넌 뒤 감악산을 끼고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것이었다.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渡河)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 호로고루다.

 

호로고루를 중심으로 주변의 고랑포와 술탄 일대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 전투 기사가 나오고 한국전쟁 때에도 중공군이 넘어올 정도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은대리성은 지리적으로 추가령 구조곡에 접해있다.

 

구조곡(構造谷)은 단층 지형이 만들어낸 선형 골짜기이므로 예로부터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말갈족이 추가령 구조곡을 이용해 빈번하게 침입해온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원산을 잇는 경원가도였고 근대에는 경원선 철도가 개통될 만큼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에 수심이 얕은 마여울을 끼고 있는 은대리성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대전리 산성(매초성)은 동네 전체가 산성이어서 마을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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