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몽골 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이경수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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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대몽 항쟁 기간 고려의 도읍지였다. 고려가 도읍을 강화로 옮겨 항전한 몽골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몽골이 고려를 치지 못한 것인지 치지 않은 것인지, 여부다. 저자는 몽골이 고려를 치지 못했다고 결론짓는다. 몽골이 고려를 본격적으로 친 시기는 1231년이다.

 

몽골은 자국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구실로 고려를 공격했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은 나라다. 대몽항쟁기 고려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으로 갯벌에 편하게 앉았고 방향 전환도 원활히 했다.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할 때 몽골은 가장 먼저 강화에 있는 성들을 파괴하도록 했다. 성곽에 대한 심적 부담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화의 성은 세 겹(내성, 외성, 중성)으로 이루어졌었다. 성곽은 강화도를 지키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 내성, 외성, 중성의 순서로 건설되어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강도(江都) 정부를 지켰다. 그러나 1259년(고종 46년) 몽골 사신의 모진 독촉 아래 파괴되고 말았다. 성곽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서 놀란 여자들이 슬피 울었다. 작업에 동원된 남자들 역시 고통의 눈물을 뿌렸다.

 

당시 몽골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총력전을 시도한다면 강화도 함락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금, 송 등과 더 큰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 온 힘을 쏟을 수 없었다. 저자는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의 지형적 특징이 몽골군에게 근본적인 난관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강화 천도(遷都)는 무신정권기에 단행되었다. 해도입보(海島入保)란 말이 있다. 해도로 백성들을 들어가게 해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다.

 

강화도에는 갯벌이 있었다. 이는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천혜의 선물이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벅찬 장벽이다. 몽골군은 물에 대한 두려움보다 갯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105 페이지) 강화도 해안은 대개 절벽이었고 그 아래는 갯벌이었다. 유빙(流氷; 성엣장)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강화도의 지형조건이 아무리 방어에 유리하다고 해도, 강화도 수군의 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육지 백성이 일찌감치 강화도 조정을 버렸다면, 그래서 강화도 정부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로운 섬 하나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장기간의 대몽항쟁은 불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118 페이지)

 

여몽전쟁의 승자는 당연히 몽골이지만 국지적일망정 고려도 무시못할 승리를 거듭했다. 수성전만 고집하지 않고 성밖에서도 전과를 올렸다. 강화도에는 삼별초가 있었다. 그들은 고려 조정이 개경 환도를 선언하고 삼별초를 혁파하자 봉기했다. 삼별초는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되었다. 최우가 밤에 도둑을 잡기 위해 조직한 군대이지만 대정부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삼별초는 좌우별초와 신의군(神義軍)를 이르는 말이다.

 

삼별초가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선포한 곳이 강화였고 그들을 키우고 단련한 곳이 강화였다. 외포리, 염하(강하해협) 등은 삼별초가 진도로 떠나간 출항지로 추정된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며 한 것은 산성입보(山城入保), 해도입보(海島入保)를 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륙 주민은 산성으로, 해안가 주민은 섬으로 피해 보호를 받으라는 말이다.

 

저자는 고려 산성 주변은 민둥했을 것이라 말한다.(민둥하다; 산에 나무가 없다. 겸연쩍고 어색하다.) 적이 숨지 못하게 수목을 베고 암석을 치웠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포(砲)는 화약과 무관한 투석기, 불덩어리를 쏜 기계였다. 몽골이 세계로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가 의도적 잔인성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지레 겁먹고 항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런 작전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잔학한 모습에 놀라 성문을 여는 일도 있었지만 오히려 각오를 다지며 끝까지 당당하게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김윤후는 몽골의 2차 고려 침입 때는 승려였고 5차 고려 침입 때는 방호별감이었다.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 죽인 공을 인정받은 결과다.

 

고려, 하면 팔만대장경을 빼놓을 수 없다. 팔만대장경의 다른 이름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다. 저자는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다시 새기는 데에 팔만대장경 조성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팔만대장경이란 명칭은 조선에서도 있었다... 雕는 독수리 조, 새길 조란 글자다.) 초조대장경 조성 시기는 1011년부터 1087년이다. 현종과 문종 때 주로 이루어졌다. 대장경은 고려 문화의 자부심이자 믿음의 구심점이었다.

 

팔만대장경은 서문 밖 판당에 보관하다가 강화도 선원사로 옮겨 보관했고 지금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다. 고려는 송나라가 대장경을 만들자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다. 고려는 송의 제후국으로 행세했으나 안으로는 천자국의 격식을 갖추었다. 전하 대신 폐하, 세자 대신 태자를 명칭으로 사용했다. 폐하의 폐는 계단을 의미하는 말로 신하가 황제를 직접 부르지 못하고 계단 아래를 바라봐 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 황제의 호칭이 되었다. 고려는 과인 대신, 짐, 6조 대신 6부라는 명칭을 썼다.

 

고려는 송과 요(거란), 송과 금(여진)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력을 높이 샀다. 청(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전쟁을 막고자 했던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고려를 통해 학습된 결과인지도 모른다.(189 페이지) 고려는 몽골 침략(1231년), 강화 천도(1232년), 항복(1259년), 환도(1270년)를 치러냈다.

 

몽골은 대개 음력 7, 8월에 침략을 시작해 그해 말이나 다음 해 봄에 물러났다. 그런데 강화도를 공격할 때는 한창 싸워야 할 겨울에 유빙 때문에 길이 막혀 답답한 지경에 처했다. 몽골이 가을에 주로 침입한 것은 전략상 이유에 의한 것이다. 추수를 앞둔 시기이기에 해당 나라의 농민들이 수확 때문에 전투 참여에 소극적이게 되고 수확 직전의 농작물에 불을 지르거나 농작물을 짓이기면 침략당한 나라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어 몽골은 훨씬 편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말도 고려(考慮)의 대상이었다. 몽골 말들은 겨울에 강했지만 더위와 습도에는 약했다. 더우기 몽골 사람들에게 고려의 겨울은 겨울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털 등으로 만드는 몽골의 게르는 겨울이 오기 전에 갖춰야 하는 월동품목이었다. 이 시기가 홀가분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시기였다.

 

저자는 몽골이 저고여 피살 6년만에 그 사건의 당사자인 고려를 응징하겠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은 공위시대(空位時代; 칸의 자리가 빈 시대)와 관계될 것이라 판단한다. 곳곳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던 제국의 유력자들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돌아와 쿠릴타이(몽골 제국 의회)에 참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공백이 불가피했다는 의미다.

 

백성들이 섬에 입보한 상태에서도 정부가 육지 전역을 통제할 수 있었던 까닭에 몽골과의 장기전을 치를 수 있었다. 금, 송에 대한 침공 작전으로 몽골은 고려에 대해 총공세를 펼치기 어려웠고 평원에서의 기마전에는 탁월했지만 산악지방의 공성전에는 상대적으로 미숙했다. 몽골군에게 해전(海戰)에 대한 공포는 큰 한계였다.

 

저자는 몽골이 마음만 먹으면 강화도를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견해는 몽골의 군사력을 너무 높게, 고려의 수비력을 너무 낮게 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에 강화도는 청나라에게 함락되었다. 이유는 청나라가, 투항해온 명나라 수군을 활용했고 홍이포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방어체계가 많이 약해졌고 대몽항쟁 말기부터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해안선이 밋밋해져 바닷물의 흐름이 완만해진 것 등에 있다.

 

대몽항쟁 후반기에 고려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세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머물며 분탕질을 했고 조운로(漕運路)도 위협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면 소금기가 다 빠질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다는 점이다.

 

책에 화보들이 수록되었다. 그 가운데 삼랑성(三郞城)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정족산성으로도 불리는 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 안에 전등사, 고려 가궐지, 정족산 사고가 있다.

 

이 책은 몽골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드문 고려의 대몽항쟁의 근원은 육지 백성의 힘이다. 물론 그랬던 백성들이 후에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고 몽골군의 침공 소식에 기뻐할 정도로 변했다. 지방관을 죽이고 땅을 들어 몽골군에게 넘기는 일도 벌어졌다. 고려가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화의를 맺고 나라를 지탱한 것은 강화도 조정이 존속했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항전 덕분이다.(2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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