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강화 평화 시민 연대 회원분들께 재인폭포 해설을 한 지난 18일은 작은 이정표 하나가 세워진 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날 해설은 의뢰는 1주일 전에 받았지만 수술(19일)을 하루 앞둔 18일 아침 8시 20분 서초구의 서울 성모병원에 도착해 코로나 검사를 받고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잠시 구상을 하고 한 해설이었다.
이날 해설에서는 강화, 김포 분들을 고려해 김포 - 강화 해협 이야기와 몽골군의 고려 수도인 강화도 공격(1236년), 몽골 군사와 혼연일체가 되어 극대화된 전투능력을 보인 몽골 말, 소 한 마리를 잡아 가루를 내어 양의 오줌보에 담으면 부피가 크지 않지만 한 병사의 1년치 식량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들이 강화도를 함락시키지 못한 이야기 등을 했다.(내 해설을 들은 분들은 15분 이상의 강화 분들과 한 분의 김포 분이었다.)
이 점이 남다른 점이었다. 즉 재인폭포든 베개용암이든 연천의 지질명소만 이야기하던 관례를 지양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또는 예우 차원에서 연천 이야기 사이 사이에 방문객들의 고향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가 서울에서 문화 해설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님에도 어떤 곳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느끼지 않지만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강화도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주목할 부분은 더 있다. 주차장 옆의 프롬나드(걷기) 조형물을 보며 직립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 뒤 연천과 강화, 김포의 공통점인 DMZ 접경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살고 있는데 용암이 덮쳐온 것인지, 아니면 용암이 지나간 뒤 구석기인들이 정착한 것인지 물으며 걷기의 중요성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했다. 짐승의 발자국을 의미하는 자귀라는 말과 짐승을 잡기 위해 그들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자귀 짚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프롬나드 조형물을 보며 이 말을 하려 했었다. 구석기인들이 자귀 짚을 때 살금살금 걸었을까요, 아니면 직립한 사람들이었으니 넓고 힘차게 걸음을 떼어놓았을까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덧붙일 말은 청나라가 침략해온 병자호란(1636년 이후) 당시 강화도의 군사들은 고려 당시의 몽골군을 생각하며 자만했다는 말이다.
청나라는 투항해온 명나라 수군을 대거 동원했고 홍이포(紅夷砲)라는 장거리 대포가 있었다. 또한 고려 당시 힘을 발휘했던 성곽들이 형편 없이 무너진 탓도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조선은 패했다.
강화에는 조선이 청나라에 함락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김상용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김상용 순절비도 있다.(김상용은 병자호란 패전으로 청나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산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란 시조를 지은 김상헌의 형이다.) 강화도는 지주들의 폭압적 수탈 사례와 소작쟁의 등이 없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고려산에 올라 서해 바다를 내려본 지난 2013년 이후 9년만에, 그리고 강화 스토리 워크 행사에 참여해 성공회 성당, 고려궁지,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 조양방직 등을 둘러본 지 3년만에 다시 강화도를 밟게 되었다.(고려산에 올라 서해를 바라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9년전 일이라니 놀랍다.) 2013년, 2019년 모두 좋았지만 이번에는 투어란 이름의 공부여서 마음 가짐이 다르다. 함께 하는 분들이 있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