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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사의 사유 - 장자와 철학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2021년 11월
평점 :
장자의 소요유(逍遙遊)가 말해진 시대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삶의 기본 틀이었던 전국(戰國)시대였다. 법가적 세계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세계였다. 춘추시대의 그 많던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져 일곱 나라만이 남은 전국시대는 학파들의 시대였고 다양한 학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구축에 있어 특히 글쓰기의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했다.
소요유는 낭만적인 느낌보다 처절한 느낌 또는 저항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장자의 사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고투를 담고 있는 철학이다. 저자에 의하면 플라톤이 einai(~이다)와 dokei(~처럼 보인다)를 명확히 구분했거니와 철학의 역사는 einai를 찾아 헤맨 역사다. 장자의 사유는 화(化)의 사유로서 왜소화된 삶에서 탈주해 대붕이 되는 철학인 동시에 왜곡된 작위(作爲)에서 탈주해 자연(自然)으로 회귀하는 철학이다.
장자의 상대로 혜시(惠施) 또는 혜자(惠子)가 있다. 명가철학자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을 철학적으로 가장 멀리 밀고 나간 학파가 명가(名家)다. 명가철학자들은 처음으로 눈뜬 이 언어라는 것의 매력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때로 궤변이라 불리기까지 할 정도의 언어철학적 사변을 펼쳤다. 아쉬운 것은 이들이 언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변으로 나아가기만 했을뿐 현실로 다시 돌아와 뚜렷한 실천철학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철학은 아나바시스(상승)와 카타바시스(하강)의 오르내림을 통해 완성되거니와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카타바시스가 없었다. 저자는 지상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꿈속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시를 쓰고 궁극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형이상학을 한다며 우리에게 고향이 세 곳이나 있으니(갈 곳이 많아) 좋지 않은가, 말한다.
장자의 사유는 주체가 세계를 구성해내는 주체중심적인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주체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놓아버리는 사유다.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앎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앎의 한계가 드러나고 그것이 비워질 때 돌연 나타난다.
장자가 추구하는 앎은 사물들의 세세한 이치를 알려고 하는 째째한 앎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 전체를 통관(通觀)하려는 너그러운/ 넉넉한 앎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세세한 이치들을 늘어놓는 수다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 전체를 전하는 담박한 언어다. 장자의 파라 독사의 사유는 이율배반이 아니라 역설에 더 가깝다. 장자의 도추(道樞) 개념을 보자. 도추는 도가 이지러져 존재론적 분절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지도리는 문의 여닫음을 가능하게 한다. 문의 이쪽과 저쪽에 상반된 것들이 존재한다. 지도리에 서는 것은 문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도추는 유(有)와 유(有)의 가운데에 있는 무(無)이다. 이 무는 없음이기보다 아무것도 아님이다. 이 지도리에 섰을 때 무엇임들의 상대성이 보이고 그것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다. 어떤 능선도 아닌 산의 정상(문제)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산의 여러 능선들(’해; 解‘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도추(道樞)란 사물의 상대적인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대립을 넘어선 절대적인 도(道)의 경지를 말한다. 도추는 양행(兩行)과 통한다. 성인은 시비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하늘의 가지런함에서 편히 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드러나는 것도 숨는 것도 아닌 은은한 빛남 즉 골의지요(滑疑之燿)이고, 도를 집요하게 사유할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도의 오묘함이다.
도는 지식으로써 끝내 소진할 수 없는 하늘곳간(천부; 天府)이고 보광(?光; 가려진 빛)이다. 장자는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면서 도/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환원론적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도를 품고 있는 사람은 빛을 함부로 직접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그 빛을 감춘다.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을 보라.
도의 경지에 설 때 어느 주관성이나 상대성에 머물지 않고 그 주관성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이기 때문에 지도리에 서지 못하고 이미 나에게로 기울어진 입장을 갖는다. 도의 세계는 이 차이가 무화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로 향하려면 결국 나와 타인 사이의 도추에 서서 해들이 아니라 문제를 보아야 한다. 장자의 사유는 파라 독사의 사유다.
그것은 특정한 독사에 고착된 사유들을 해체하고자 하며 그러면서도 상대성에 만족하기보다 그것들을 보듬는 파라 독사의 차원을 응시한다. 때문에 그의 사유는 독사들이 갈라지는 지도리 나아가 현실성과 가능성이 갈라지는 지도리에 서서 사유하는 도추, 양행의 사유다. 장자는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고 공자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하려고 했다.
장자가 볼 때 공자는 안타깝고도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유가 철학이 중시하는 것이 인정(人情)이고 도가 철학이 극복하려는 것이 인정이다. 유교는 위타(爲他)의 철학, 장자의 사유는 위기(爲己)의 철학이다. 배움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장자의 원래 생각이지만 그런 자연이 이미 왜곡되어 왜소화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날아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도는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다. 삶속에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