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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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인도(印度), 요가, 파괴적 사랑, 식이장애, 깨달음 등의 키워드로 분석할 수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인도 마이소르 아쉬탕가 요가 연구소에서 요가 아사나, 요가 철학, 산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쓴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요가 수행 자체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은 아니지만 기법보다 중요한 정신에 대해 회의하는 형식으로일망정 많은 사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요가 강사인 정윤희라는 여자로 그녀는 요한이라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윤희는 인도로 건너간다. 그녀가 단행한 것은 수행이기보다 여행이었다. 그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카르마의 문제점은 물론 요가 수행자들의 욕심 등을 불편하게 바라본다.

 

윤희는 요가에 대해 이런 의문점을 갖는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제어함으로써 요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욕망이 모두 소진되어 무력해지고 마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61 페이지) 윤희는 사랑하는 사람 요한의 난치병을 보며 그에게 그런 삶을 허락한 신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몸부림친다. 윤희는 급기야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기에 그런 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윤희는 요가 강사로서의 삶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진짜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고통스러운 아쉬탕가 요가를 그만 두지 못하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소설은 윤희가 한국에서 만난 요한과의 일을 한 챕터에 걸쳐 이야기하고 다음 챕터에서는 인도에서의 사건을 전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작품이다.

 

윤희는 교회에서 요한을 알게 된 이래 그의 작곡가로서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문에는 요가에서 가장 큰 죄악은 살인도 절도도 투기도 아닌 무지라는 말이 나온다. 무지의 늪에 빠진 사람은 끊임없이 죄악의 업보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는 드물게 만나는 것인 만큼 귀하다. 여덟을 의미하는 아쉬토와 나뭇가지 또는 단계를 의미하는 앙가의 결합어인 아쉬탕가는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서 제시된 요가의 여덟 가지 측면을 의미한다.

 

요가는 결합을 의미한다. 요한의 부모는 큰 자산가임에도 아들을 치료하느라 재산을 소진하고 요한은 몸 때문인지 병적인 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윤희는 요한의 그런 모습을 보며 요한도 맑고 환하게 빛나는 신의 아들이 아닌 더럽고 추악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윤희는 식이 장애를 앓는다. 그녀는 새벽에 요가 수련만 마치고 나면 종일 자신의 손과 입에서 음식들을 떼어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나 인도에서 그녀가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 외에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절제가 주요 미덕인 요가 수행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인 듯 하다. 윤희가 어릴 적부터 앓아온 폭식증이 재발한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면서부터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가 인도로 오며 가장 바랐던 것은 그저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정량의 음식만을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어서,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 나누고 싶지 않아서 인도 마이소르 땅까지 도망쳐온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는 요가 수행을 하는 지인 언니들의 위선(?)에 분노감을 표출한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 줄 모르고 그저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무언가를 비우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수련을 해나가는 요가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무언가 더 가지기 위해 요가까지 하는 사람들...”(232 페이지) 상당히 아픈 이야기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깊이 돌아보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요가 정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못지 않게 윤희가 앓는 폭식증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은 윤희가 인도 여행에서 도움을 받은 케이와 나누는 이야기로도 눈길을 끈다. 어차피 똑같은 수련법이라면 왜 굳이 이곳 마이소르까지 와서 매일 수련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케이의 말에 윤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논리를 들려준다.

 

윤희는 아쉬탕가 요가를 접하고 새벽마다 똑같은 순서의 수련을 반복하다보니 차이란 반복되는 것들의 차이고, 반복이란 차이 나는 것들의 반복이라는 ‘차이와 반복‘의 철학이 받아들여지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삶과 철학과 요가가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 같다고 말하는 윤희는 회의(懷疑)하고 시달리니 어쩐 일인가?

 

새로운 깊이, 몸으로 부딪치는 현실의 접면이란 말을 차이와 반복의 문제의식으로 읊조린다. 요가라고 불리는 원초적 선정(禪定) 수행(일지 스님 지음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참고)이란 말도 아울러.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소설이 재미를 찾아가게 하는 것 만큼 수행과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드물게 느끼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차문디 언덕이란 남인도의 옛 도시 마이소르에 자리한 언덕이다. 이곳에 1001개의 돌계단과 함께 그 위에 차문디 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있다. 차문디 언덕 계단을 오르며 동행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맨발로 산을 올라가는 고행이나 단식 또는 시바 신의 이름을 거듭 염송하는 것과 맞먹는 영적인 공덕을 가진다.(에리얼 글룩리크 지음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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