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황진이’를 듣는다. 스물 여섯 살 최향이란 분이 부른 곡이다. 가수는 매서운 눈매와 약간 거칠어 묘한 매력을 띠는 목소리로 매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술이 아닌 것에도 취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곡은 묘하게 슬픈 한편 마음을 설레게도 한다.

 

못 이룬 사랑을 아쉬워하는 노랫말 가운데 ”서 화담 그리운 님 저승 간들 잊을쏘냐 섬섬옥수 고운 님아...“란 구절이 있다. 화담은 황진이와의 이야기로 유명한 서경덕의 호 화담(花潭)을 말한다. 서경덕은 복재(復齋)라는 호도 썼었다. 주역에서 유래한 호다. ”서 복재 그리운 님 저승 간들 잊을쏘냐”라고 했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지난 8월 25일 미얀마 민주화 운동 후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인사동 나무화랑)에 다녀왔다. 신영복 사상 연구 단체인 더불어숲과 성공회대 교수회가 공동 주최한 ‘미얀마 민중과 함께 여는 새날’이란 제목의 이 전시회 출품작들은 신영복 선생님에게서 서화를 배운 제자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나는 안내 직원에게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작품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며 석과불식과 관련 있는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를 간단히 설명하기까지 했다. 아래로부터 다섯 음효가 자리한 뒤 오는 하나의 양효가 씨 과일로 쓸 석과의 의미를 갖는다. 이 산지박 괘 다음에 지뢰복 괘가 자리한다. 산지박에서 지뢰복으로의 변화는 박탈(剝奪)당했다가 회복(回復)되는 것을 뜻한다. 서경덕의 복재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내 처지(處地)가 석과를 떠올리는 불우(不遇)한 처지라 생각하다가 곧 다른 생각을 찾는다. 석과를 떠올린다는 말은 모든 과일이 떨어진 뒤 하나 남은 씨로 쓸 과일을 떠올린다는 뜻이다. 불우하다는 말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행하다는 의미이니 무엇인가 만들지 못한 나와 연관지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한다.

 

서경덕은 어땠을까? 죽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서경덕이 아닌가? 그는 젊은 시절에 어진 스승을 만나지 못해 공부에 헛심을 많이 썼다고 말하며 공부하는 이들은 이런 나를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 덧붙였다. 그리고 몽매함을 깨우쳐 줄 스승을 만나지 못해 잡된 공부에 얽매였다는 말을 했다.

 

관건은 무엇일까? 좋은 시절을 나의 덕이 만든 결과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리치 칼가아드의 ‘레이트 블루머’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늦게 피는 사람들인 레이트 블루머들은 일찍 피어난 어얼리 블루머들에 비해 호기심이 많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연민 능력을 갖추었고, 회복력을 갖추었고, 통찰력과 지혜 등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성공을 나의 덕으로 돌리지 않는 것과 공명한다. 어얼리 블루머든 레이트 블루머든 꽃이 피었다고 하지 말고 꽃을 피웠다고 해야 하리라. 오규원의 시는 어떤가?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

 

이 경우 별이 죽음을 맞이하며 우주 공간에 흩뿌린 원소들이 우리 몸을 이루고 바위를 이루고 꽃을 이루는 것이니 그렇게 엄청난 차원으로 담긴 우주의 진리 앞에서는 꽃이 피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무거운 원자핵들은 뜨거운 별의 중심핵에서 가공되어 별이 폭발할 때 방출된다.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들은(우리를 구성하는 성분들도) 사실상 격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자이안트 날리카 지음 ‘별의 일생’ 153, 154 페이지)

 

”꽃은 한꺼번에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많다. 꽃이 거의 동시에 피기 때문에 꽃들의 수분(受粉) 매개체에 대한 선택압력이 크다. 따라서 꽃들은 수분매개체를 유인하기 위해서 적응하다 보니 저마다 크고 화려한 색깔들을 띠고 있다.“(이상태 지음 ‘식물의 역사’ 214 페이지)

 

생태 전문가 차윤정은 이런 말을 했다. ”한 번이라도 꽃을 피워본 사람이라면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꽃이 피기까지의 그 긴장감과 피어 있을 동안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면 차라리 햇빛에 녹아버리며 시들어가는 꽃잎에서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꽃으로 피어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이다.“(‘꽃과 이야기하는 여자’ 41 페이지)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들은(우리를 구성하는 성분들도) 사실상 격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고 ”스타일이 없으면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11 페이지)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늦게 꽃 피우는 일 역시 의미있고 그래서 기꺼이 감내해야 과제이자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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