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지질(地質) 해설사로부터 지질은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내가 들은 말은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이다.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은 내가 순화해 전달하는 말이다. 카더라는 ~ 한다고 하더라의 사투리 발음이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추측해 사실처럼 전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참 충격이다. 그 이유는 그 분의 발언이 너무도 뜬금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 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이런 글이나마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어떻든 나는 그 분에게 어설프게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근거 없이 말해지는 지질 사례를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란 말도 하지 못했다.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분은 타자(他者)라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 같은 학인(學人)으로 하여금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고 공부의 기회를 갖게 하는 이방인 즉 경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자리하는 분이라는 의미다. 오래 전 즐겨 읽던 책을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대중은 말 자체가 함축하듯이 특수하게 개념화된 언표들을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다. 대중은 특수한 개념들이 분화하기 이전의 차원, 인간됨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차원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존재이다. 즉 대중은 감성적 언표의 수준에서 삶을 영위한다. 감성적 언표는 비반성적 수준의 언표”(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08 페이지)라는 말이다.

 

과학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과학이란 말을 많이 써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습성을 감안하면 그 의미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이상하다. 당연히 반성할 일이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증거와 논리를 기반으로 해 자연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식이 과학이다. 유명한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 즉 반증(反證) 가능성이 있는 것을 과학이라 설명했다.

 

반증 가능성이 있다의 반대는 당연히 반증 가능성이 없다란 말이다. 이 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영혼이 있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과학이 진지하게 연구 대상으로 삼을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범준 교수는 과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과학은 아스라이 윤곽만 보이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긴 항해라는 것이다.

 

물리학자 출신의 과학 저술가인 일본의 다케우치 가오루는 “백만 번 실험을 해서 이론에 맞는 데이터가 나왔다 해도 바로 다음 번에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실험만 할 수도 없다.”는 말로 과학과 수학의 차이를 설명했다. 수학은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어서 한 번 증명하면 끝이지만 과학은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증(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과학은 if’ 108 페이지)

 

다윈 진화론을 열렬히 변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토마스 헉슬리는 이런 말을 했다. "객관적 사실 앞에 아이처럼 낮춰 앉아라. 모든 선입관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져라. 어디로 간들, 어떤 나락에 다다른들 겸손한 마음으로 대자연을 따르라.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과학 저술가 스티븐 버트먼은 초기 그리스인들이 지질학의 역사를 신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과 달리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은 신화의 안개에 이성의 햇살을 비추는 동시에 지구의 창조를 사실주의적으로 새롭게 설명했다고 말한다. 과학은 애초에 자연철학이었다. 본가인 철학에서 분가해 나온 학문이 과학이다. 과학은 분과학문(分科學問)의 줄임말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의 사상가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리토스 등은 언덕 꼭대기에서 화석으로 변한 조개 껍데기를 발견하고 지구 표면이 항상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 가정하며 지중해가 땅으로 덮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했다.(‘세상의 과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중 지리학과 지질학 부분; 194 페이지)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 지질학의 창시자는 니콜라우스 스테노(스웨덴 이름으로는 닐스 스텐센; 1638 - 1686)다. '프로드로무스’란 저서를 통해 그는 네 가지 지질학 원리들을 정립했다. 1) 누증의 법칙, 2) 퇴적암 법칙, 3) 고유 수평성의 원리, 4) 측면 연속성의 원리 등이다.(캐서린 쿨렌 지음 ‘천재들의 과학 노트’ 참고) 카더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원리를 쳬계화한 것이다. 나는 물론 니콜라우스 스테노의 관점과 현재 지질학의 원칙인 동일과정의 법칙, 지층누증의 법칙, 천이(遷移)의 법칙, 부정합의 법칙, 관입의 법칙 등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앞서 말한 지질해설사는 과학을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백의리층을 영어로 Baekeuiri layer라고 설명하는 전문가가 있고,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하는 전문가는 layer는 형태에 초점을 맞춘 용어이고 formation은 축적된 시간 즉 연대에 따른 결과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설명판에 기록된 대로 백의리 포메이션이라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인폭포가 평강 오리산 등지에서 흘러온 용암에 세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고 두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 지질에서의 이런 어긋남 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은,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과학이란 것이 오류와 착오와 함께 다루어지는 학문이어서인지 그런지 꽤 많다. 앞에서 언급한 지질해설사는 혹시 이런 어긋남(상위; 相違)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인가?

 

그 분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접했을 때 생각을 거듭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전문가에게 문의하거나 책을 찾아 보는 수고로운 과정을 치렀을까? 나는 그 분이 지질의 모든 내용이 ”카더라”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내용은 해설사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받고 전하는 것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그 분은 수긍하며 다만 전문가들은 잘못된 내용을 더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설명하는 방식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분은 곧 있을 수업(授業)을 지질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 분은 근거가 불분명한 말을 해설사들보다 더 교묘하게 치장하고 꾸미는 기술에 능한 전문가들로부터 교육을 받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분의 대응 가치도 없는 주장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투척한 넌센스도 내게는 해명해야 할, 그래서 공부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데이터(문제로서 주어진 것)가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적 발언일수록 더욱 근본 차원의 쟁점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 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설사들이 던진 두서 없고 ”틀렸다고 할 수조차 없는“ 엉터리 말을 듣고 만부당한 말을 하는 해설사들이 있다고 하는 대신 지질은 카더라 식의 학문이라는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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