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난해한 학문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자의 준비 부족 혹은 열성 부족(수십 번이고 되씹어 생각해야 할 것)을 탓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게 된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나는 만년에 이르면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금 길지만 양자역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참고할 만한 글이어서 인용했다. 물론 양자역학만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대하는 자세에 적용해도 좋을 이야기다. 장회익 교수는 공부하는 사람을 달을 가리키는 손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으로 나누어 비유한 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고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장회익 교수는 자칭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질공원에 대해 공부(또는 해설)하는 데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의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 적용된다. 장회익 교수는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기에 좌절을 겪는 학생 단계는 오래 전 넘어선 분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굳이 달을 보기를 소망하는' 분이다.

 

장회익 교수의 분류에서 달을 보려는 이유 때문에 좌절을 겪거나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을 겪는 사람이다. 상징폭력이란 선학(先學)들이 이루어놓은 지식의 장(場)에 진입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기에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겪는 고통이고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공간에 진입해 그 장(場)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이 연구할 만하다고 믿는(오인하는) 사람들이 감수하는 고통이다.

 

부르디외의 말과 장회익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달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달은 아무런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말은 오컴의 면도날을 조금 변형해 생각하게 한다.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원리다. 이를 변형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은 쉬운 내용만 다루고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의문 자체를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편하고 쉬운 내용만 전하려는 사람이 분명 있다. 해설계에 특히 지질해설계에서도 그런 일은 빚어진다.

 

브레너의 빗자루란 개념을 생각하기로 하자. 분자생물학자 시드니 브레너에 의해 고안된 이 개념은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일단 용감하게 발표하고 나서 해결되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참고) 이 역시 변형하면 해설하는 사람은 끊임 없이 의문을 가지고 기존의 개념이라도 색다르게 설명할 아이디어를 갖게 될 경우 기존 지식과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롭게 가다듬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최근 某 지질해설사와 대화를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자신은 과학(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지질(해설)에 굳이 새로운 과학 내용이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관건은 조금 더 나은 기법을 찾아내는 것이고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것이다. 지질 책은 물론이고 여타 과학 책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생각하고 기법과 내용으로 삼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금 관념적일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으며 내가 이해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물은 느린 사건이다. 빠름과 느림은 상대적이란 의미다. 이를 재인폭포에 적용하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각자 재인폭포가 관심을 끄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설명(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쉽게 풀어 하는 설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어떻든 이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로 다시 돌아가자. 먼저 말할 것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폭력은 선학(先學)들의 지식(知識)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까닭에 그 개념에 익숙해져야 하므로 빚어지는 어려움이다. 이는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뉴턴의 말과 관계 있다는 뜻이다. 장회익 교수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대비했다.

 

‘스피노자의 뇌’(원어는 Looking for Spinoza’)의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서재를 방문해서 본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에 대해 그가 필요로 했던 책은 미니멀리즘이 무색할 정도라는 말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의 서재 방명록에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서재를 다녀간 것은 1920년이다.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의 책이다. 스피노자는 뉴턴과 함께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 지적 거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다르게(창조적 배반?) 계승했다. 뉴턴 역시 데카르트에 빠져 있었지만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데카르트에게서 적당히 떨어져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뉴턴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의 동시대 학자들의 이론을 폭넓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동시대 학자들 중 한 사람이 가상디다. 물질의 본질을 외연(外延)으로 본 데카르트에게 공간과 물질은 구분이 불가능하고 전체 우주는 물질로 가득찬 플레넘(물질로 충만한 공간)이었다면 가상디에게 우주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라는 입자'가 진공 속을 날아다니는 공간이었다.(박민아 지음 ‘뉴턴 & 데카르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 참고) 곁가지이지만 세상 만물이 그렇듯 우리 몸 역시 거의 대부분(99. 999%) 텅 빈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우리는 그 빈 공간을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법하지만 원자의 외곽을 구성하는 전자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빈 공간과 다름 없는 우리가 역시 빈 공간이나 다름 없는 벽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별개의 것으로 본 데카르트와 달리 몸과 마음의 일원론을 제시했다. 장회익 교수는 스피노자에 의거해 “양자역학 이전에는 위치공간과 운동량공간을 서로 독립적인 두 공간으로 보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면서 이것이 한 공간의 두 측면임이 밝혀진 것”이란 말을 한다.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 내에 있는 정신과 신체 상태간의 상관관계는 독립된 두 계열간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계열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체가 ‘베임‘ 하고 울리면 정신은 ’아픔‘ 하고 울리고 정신이 ’팔을 움직임‘ 하고 울리면 신체는 ’팔이 움직임‘ 하고 울린다는 흥미로운 말을 덧붙인다.(’에티카를 읽는다‘ 246 페이지) 신승철은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잘 살펴보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감정이라면 움직일 때의 마음은 정동(情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인 감정은 망상과 같아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와 머릿속에서 공회전한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147 페이지)

 

요즘 오랜만에 양자역학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내가 지난 3월 중순 문을 연 경기도 연천 전곡의 달달(달리는 달팽이) 서점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다. 이 서점은 내게 사랑방 같은 의미 공간이다. 책을 주문하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가서 받아 대화를 하는 의식(儀式; Officium) 같은 일이 펼쳐지는 곳이다. 작은 서점이 아니라면, 그리고 운영자가 함께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아니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산 그 책을 꽂아두고만 있다가 양자역학에 대한 관심 재점화 덕에 집어든 것은 여름이 다 저물어 가는 8월 15일 이후의 일이다. 장회익 교수의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킨 이들과 그들의 학문을 ‘심학십도(尋學十圖)’의 형식으로 정리해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한 책이다. 심학십도란 이율곡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불가의 심우도(尋牛圖)를 조합한 말이다.

 

2007년 나온 최종덕 교수와의 대화집인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장회익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알고 가르치느냐 하는 점을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지식을 새로 짜나가야 해요....학문을 다시 짜야 해요. 우회로를 버리고 직선으로 뚫어야 해요. 핵심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강구해야지요.”(41, 42 페이지) 앞 부분에서 말한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 그 과정에서 절망도 느끼는 사람이 감내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말한 조금 더 나은 기법과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길과도 통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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