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뉴라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주의론' 비판
이철우 외 지음,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 기획 / 푸른역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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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사학자들 다수와 몇몇 의사학(醫史學), 법학(法學) 전공자 등 18명의 필자들이 참여해 뉴라이트의 논리적 모순을 논파한 책이다. 사실에 입각하되 체계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글‘을 집필 원칙으로 삼아 쓴 책이다. 출판사의 편집부에서는 책이 너무 차분하고 객관적이다 못해 냉정하게 비치기도 해 더욱 호소력이 있다고 평한다.

 

이철우는 한국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일본의 일부가 된, 승전국도 식민지도 아닌 나라였었기에 일본에 대해 어떤 배상 청구의 근거도 가지지 못한다는 논리의 모순을 제기한다. 뉴라이트 학자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수탈하고 억압했다는 주장은 과장되었거나 터무니없으며 일제는 법치와 자본주의 교환관계에 의해 경제활동을 전개했을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써야 할 말은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수출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출(移出)이 늘었다는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우리가 이룬 증산분보다 훨씬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우리가 식량 부족을 겪었다는 점이다. 산미증산계획과 일본으로의 쌀 이출로 이익을 본 것은 일본인 대지주와 소수의 조선인 지주에 불과했다.

 

당시 우리에게 경제 발전은 혜택없는 개발에 지나지 않았다. 박한용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사람들의 주장에 숨은 의도를 밝힌다. 그들의 주장이 이루어지면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나 임시정부의 공로와 무관하게 세워진 것이 되고 해방 후 3년간 피어린 반공투쟁에 나선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되는 것이다.

 

또한 노덕술, 김성수 같은 특급 친일파들은 건국의 공로자가 되고 민족주의자로서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조차 반국가 사범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49 페이지)

 

끝없이 확장되는 민주주의라는 영역에 굳이 자유라는 접두어를 고집하는 저의를 바로 파악해야 한다. 전재호가 말했듯 뉴라이트 진영에서 우리를 종족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를 미개한 부족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다. 반일종족주의는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야만으로 몰아붙이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은 합법적이었고 따라서 국가총동원법이나 국민징용령을 일본 국민이었던 한국인에게 적용한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명확하게 차별받았고 권리보다 의무가 앞선 예속민이었다. 당시 한국인에게 보통 선거든 제한 선거든 국정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황상익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이라는 사이트가 제시하는 의사 수 그래프만 보면 일제와 그 추종자들이 식민지 통치의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는 보건의료 분야의 근대적 발전을 사실인 양 오인할 수 있지만 그 그래프가 감추고 있는 이면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우리의 주장을 공격한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제기된 구체적 피해 사실에 대해 반증하지 못한 채 그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만을 하고 있다. 의아한 것은 일본 기업과 재판소가 인정한 가해 사실을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냥 식민지가 된 게 아니다. 밖으로부터의 침략만으로 무너지는 나라는 없다. '반일종족주의'는 또다시 식민지적 상황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책이다"(106 페이지) 김창록의 인상적인 말이다.

 

정태헌은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거둬갈 파이를 키우기 위해 무자비한 약탈과 더불어 수탈의 원천인 잉여가치 규모를 키우는 개발을 병행함을 지적함과 아울러 방임된 시장경제만으로 또는 국가의 뒷받침 없이 기업가만의 힘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전개된 경우는 없었음을 논한다. 조선인은 1인당 미곡 소비량에서 공출이 자행된 전시체제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인 1911~1934년에조차 격감(0. 786석에서 0. 379석으로)했다. 단순 노무직에 집중된 고용구조 때문에 기술 이전 효과도 논하기 어려웠다.

 

황상익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을 세운 배경을 논한다. 일제가, 대한제국이 1899년 자주적으로 설립해 운영한 의학교(국립의과대학)와 광제원(국립병원)을 1907년 강제통합해 세운 병원이 대한의원이다.(81 페이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유럽 식민지들과 달리 일본은 한반도를 많은 일본인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 즉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정부가 거액의 일본 차관을 들여와 최상급 의료기관을 짓게 했다. 물론 일제는 대한제국의 의료 발달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전염병에 대한 통계조차 세우지 않았다. 일반 병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강성현은 역사적 사실을 인멸한 자들이 엄격한 실증주의자를 자처하는 현실을 개탄한다.(166, 167 페이지) 두더지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논박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른 이론이나 사실을 들고 나와 반박해보라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30 페이지) 강제 연행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강성현에 의하면 그것은 증거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다.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증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일부분에 대해 인정하더라도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하든지 예외에 해당한다고 하든지 남들도 그랬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덕적 책임이지 법적 책임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가해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피해자에게 무한 입증을 요구한다.

 

그간 역사부정론자들은 일본군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하기 위해 강제연행한 사실을 마치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프레임 싸움으로 몰고 갔다. 공창제 하에서 소개업은 필연적으로 인신매매가 조장되었다. 이를 자유 계약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극복해야 할 것은 사실의 진위와 무관하게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탈진실 현상이다.

 

변은진은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차이를 언급한다. 전자는 팩트의 문제고 후자는 팩트이면서 역사 인식과 관련된 문제다. 수많은 사실(事實) 가운데 무엇이 사실(史實)이 되어 기록되고 교육될 것인가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담고 있는 역사인식의 문제다.(181 페이지) 변은진은 역사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노력이 어우러져 변화, 발전하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비록 한계가 있었지만 3.1 운동 이래 국내외 항일 운동 특히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 국외의 항일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 측에 합류하여 끝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의 방향은 더 어렵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항일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그리고 3.1 운동을 통해 전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분출시켰기에 카이로 회담 이래 연합국의 전후 처리 논의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을 당연히 독립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도출되었을 것이다.(184 페이지) 변은진은 항일운동사는 과잉 평가된 게 아니라 여전히 덜 밝혀지고 미평가된 역사라 말한다.

 

김정인은 역사 교과서의 의미를 짚었다. 그에 의하면 보수 우익에게 교과서는 정권의 명운을 건 만큼 반드시 전유해야 하는 이념적 무기였다. ’반일종족주의‘는 식민지 수탈론 비판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다. 김헌주는 ’반일종족주의‘는 학술서적인 측면이 있지만 학술서를 표방한 대중서이자 정치적 선전물에 가깝다고 말한다. 김헌주에 의하면 이 책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반일 민족주의라는 개념 대신 굳이 종족주의라는 1차원적이면서 인종주의적인 개념을 내세웠다.

 

김헌주는 '반일종족주의의 자가당착의 논리적 모순을 제기한다. 그 주의가 기획된 것은 이승만학당의 유튜브 강의에서였다. 해방 이후 1997년 정권교체 이전까지 50년 동안 이승만 정권을 계승한 정당이 권력을 잡았고 '반일종족주의'는 그때 절정에 달했다. 또한 그들이 극찬하는 국부 이승만도 반일 민족주의자였다.(233 페이지)

 

이승만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이루기 위한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반일정책을 펼쳤다. '반일종족주의'는 한국의 문명수준을 원시적 단계로 설정했다. 그런데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고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인간형을 구축하며 북한과의 체제 대결을 시도한 것이 그들이 예찬하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 반세기 동안 지속된 자유주의 근대문명이 십수년에 불과한 좌파정권에 의해 원시회귀했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서승은 맥아더가 천황을 죽이는 대신 인간선언을 하게 하고 왜소한 천황의 사진을 각 신문의 1면에 보도하게 해 신격을 박탈한 상징 천황을 미군 점령 정책의 수족으로 활용했고 일본은 냉전으로 인해 생긴 장벽을 기화로 이웃 나라들에 끼친 침략 및 식민지 지배 책임을 모른 체 하며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서승에 의하면 일본과 일체가 된 친일파는 세계적 구조 변화 속에서도 냉전시기의 떡고물을 잊지 못하고 냉전의 지속을 바라는 세력이다. 개별적인 능력이나 외모에서도 일본인과 유사하고 문화적으로 앞선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인을 철저하게 열등한 존재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반공과 북한 적대를 내세워 한국 정부를 구태의연한 한미일 군사동맹의 틀 안에 묶어놓으려고 끊임없이 싸웠다. 이는 일본 중심의 반공, 반중국의 동아시아 세계를 복구하려는 의도의 결과다. 서승은 일제 잔재라는 용어보다 친일 레짐(regi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레짐이란 용어를 써야 정치, 군사, 경제적 패악과 제도적 의미를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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