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책을 빌려가 벽지로 쓰고 있는 친구 이야기가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출간된 한 승려의 산문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에게는 책도, 유교도, 불교도 깨달음을 얻는 데 필요한 통발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 않은가?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그 책이 책도, 유교도, 불교도 깨달음을 얻는 데 필요한 통발로 여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극적이고 멋지지만 그에게 친구의 책은 깨달음의 수단 이상은 아닌가?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책을 빌려간 그 사람은 책을 찢어 벽지로 쓸 만큼 빈한한가?
문제는 더 있다. 깨닫고 나면 다시는 책을 들춰볼 필요가 없는가? 최근 연천 지질공원에 대한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심정이 복잡했었다. 동료들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알린다면 알라딘의 신간 링크를 보내줄 것인가, 내가 산 책 사진을 찍어 보내줄 것인가? 등등으로 복잡했었다는 의미다. 결국 링크를 보내는 방식으로 일부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내 책도 아니면서 왠 고민인가? 하겠지만 평소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을 어이없어 하던 주제 넘은 입장으로 좋은 교재가 나온 것을 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만 보고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을 알려주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알린 것이다.
알라딘의 신간 링크를 보내줄 것인가, 내가 산 책 사진을 찍어 보내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이유는 어디든 책 사기를 아까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형편이 좋으면서도 책 사기를 아까워 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해설을 하는 데 도움을 준 저자들에게 빚을 진 것이 분명하다면 저자가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책을 사 경제적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선행이 쌓여 출판계가 좋은 책을 계속 낼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든 링크를 보낸 것은 내가 산 책을 찍어 보낼 경우 빌려달라는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책은 곁에 두고 읽고 익혀야 하는 것인데 빌려 읽겠다고 하면 제의를 받은 나는 나대로 불편할뿐더러 공백이 생기고 빌려서 읽는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간략하게 한 번 말한 바 있지만 연천 지질해설사가 된 이래 늘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느껴 매일 과학 책들 특히 지질 신간을 검색했다. 내게서 신간 출간 소식을 들은 한 분은 내게 거듭 감사함을 표했다. 감사한 일이지만 내 책도 아닌데 과한 감사함을 들어 송구하다. 내가 알린 분들이 비슷한 처지나 마음이 맞는 동료들에게 책 소식을 전하리라 생각한다.(내가 책 소식을 전한 분들은 마음 맞는 분들이다.) 책 내용을 획일적으로 전하는 해설을 하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책을 읽는 사람이 누구든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내용을 익혀 새롭게 구성하고 해설을 구상하는 노고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