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의 문장 - 신유한 평전 18세기 개인의 발견 1
하지영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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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신유한(申維翰; 1681 - 1752)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가 임술년 연강(연천) 뱃놀이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1082년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 뱃놀이를 모방한 홍경보, 정선, 신유한의 뱃놀이는 1742년 10월 기망(旣望)에 있었다.(왜 소동파가 즐긴 7월이 아닌 10월이었을까? 홍수 때문이었을까?)

 

홍경보는 경기 관찰사였고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그림의 대가였다. 시의 대가이자 ‘해유록’, ‘청천집’ 등으로 유명한 저자였던 청천(靑泉) 신유한은 당시 연천 현감이었다.(그가 태어난 곳은 경남 밀양이다.) 그의 호 청천은 어머니가 꾼 태몽인 푸른 학의 청(靑)과,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으나 뜻 밖으로 말랐다가 일주일만에 다시 솟아난 샘의 천(泉)을 합한 말이다.

 

달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18세기 개인의 발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하지영의 ‘천하 제일의 문장’은 신유한의 삶과 문장,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조명한 신유한 평전이다. 그는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이자 서얼(庶孼)이었다.(21 페이지) 그가 연천 현감으로 제수(除授; 추천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함)된 것은 1739년이다. 1년전인 1738년 연천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임술 뱃놀이를 치른 1742년 이후 1743년까지 연천 현감직을 수행했다.

 

당시는 연천에 큰 물이 나 많은 사람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88 페이지) 신유한은 도학(道學)의 전통이 강한 영남 지역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굴원(屈原)의 ‘이소(離巢)’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후에 자신보다 ‘이소’를 좋아하는 자도, 자신보다 ‘이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도 없다고 자부했다.(314 페이지)

 

그는 증광(增廣) 진사시에 2등 18위로 합격했으나 끝내 만족할 만한 벼슬을 하지는 못했다. 신유한은 서얼허통이 이루어진 시대에 태어나 그 시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갈 수 있는 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61 페이지) 증광시는 조선 시대 때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기념으로 보게 하던 과거를 말한다.

 

신유한은 문장이 자신을 입신하게도 했고 그르치게도 했다고 생각했다.(100 페이지) 신유한은 문체가 괴이하다, 난해하다, 요즘 문장이 아니다, 정도를 따르지 않는 문장이다 같은 말을 들었다. 최창대는 신유한이 고(古)를 지향하지만 정신을 닮는 것이 아니라 자구만을 본뜨는 의고(擬古)의 폐단이 있다고 지적했다.(240 페이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문신인 윤순(尹淳; 1680 - 1741 )은 신유한에게 문장이 아니라 도학에 전념하라고 충고했다. 물론 신유한은 윤순의 충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도(道)와 문(文)이 별개라는 신유한의 생각도 논란거리였다. 신유한은 문장이야말로 자신이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생각했다.(259 페이지)

 

신유한이 과거에 급제한 직후 정치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인물은 최석정, 최창대 부자다.(최석정의 조부가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 主和論‘의 대표자였다.) 신유한은 봉상시(奉常寺; 제사와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는 일) 임무를 하다가 지방관으로 나가곤 했다. 그가 지방 수령으로 보낸 시간은 17년이다.(77 페이지)

 

신유한이 사행단(使行團)의 일원(제술관; 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쓴 ‘해유록(海遊錄)’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명저다. 제술관은 조선 시대, 전례문(典禮文)을 지어 바치던 임시 벼슬이다. “‘해유록’은 신유한의 문장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데다가 집집마다 소장하고 애송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유통되었다.”(141 페이지) ‘해유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쌍벽을 이루는 성과로 꼽힌다.(141 페이지)

 

‘해유록’을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약용은 신유한이 기물의 정교함이나 조련하는 법에 대해서는 상세히 관찰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신유한은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나 양국 교류에 생산적인 제안을 하지 못했다. 정치적 안목보다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유한에게 만남을 제안한 사람 가운데 겸재 정선의 다섯 살 연상의 친구였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도 있었다. 최석정이 인물을 제대로 등용하지 못하는 조선의 현실을 규탄했다(155 페이지)면 이병연은 신유한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한탄했다.(199 페이지)

 

연천은 다스리기 어려운 잔악한 고을이었고 흉년까지 만나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었는데 신유한이 백성을 구제하여 온 경내가 편안해 백성들이 흉년을 근심하지 않았다.(385 페이지) 신유한이 연천 현감으로 재임한 시기는 59세에서 63세까지다.(291 페이지) 신유한이 일생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큰 스승이 있었다. 바로 미수 허목(1595 - 1682)과 고운 최치원이다.

 

신유한은 허목을 통해 문학적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학문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했다. 신유한이 척박한 땅 연천에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허목 덕분이었다.(226 페이지) 신유한은 강한 자의식, 복잡한 내면을 숨기지 않고 문학 속에 쏟아냈다. 자신의 문학세계를 해명하는 글쓰기를 반복했고 지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의 지나온 삶과 일상, 불편한 심사를 빈번하게 노출했다.(280 페이지) 


신유한도 현실의 모순을 거론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개인적인 세계로 도피해 문제를 해소하는 한계를 드러냈다.(293 페이지) 신유한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는 그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월적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309 페이지) 이는 그가 개인 차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 빚어진 필연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용문산인(龍門山人)이라 자호(自號)했다. 용문은 사마천의 출생지이다. 잘 알려졌듯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천문관측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다가 한무제에 의해 기회를 박탈당한 뒤 홧병으로 죽은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여행을 과제로 부여받았다. 사마천에게 여행은 아버지 사마담을 이어 하게 된 역사서 집필을 위한 전제이자 과제였다. 사마천은 초나라의 충신이자 '초사(楚辭)'의 저자인 굴원이 간신의 모략으로 자결한 비극의 현장인 멱라강을 둘러보기도 했다.(신유한이 어려서부터 읽은 '이소'는 '초사'에 수록된 장편 서정시다.)


사실 사마천은 역사가이기 이전에 여행가였다.(김선희 지음 '나를 공부할 시간' 20 페이지) 이런 점에서 보면 신유한은 흥미롭다. 그는 사마천은 넓은 곳을 유람했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신은 좁은 공간에 거할지라도 상상의 유람을 할 수 있기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은 인식의 한계 안에 있었고 자신은 인식의 경계 밖에서 노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굳이 용문이라는 말을 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는 곳 이상을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인가? 


신유한은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했다. 신유한은 청운의 꿈을 안고 소론, 노론, 소북 할 것 없이 자신을 알리고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286 페이지) 신유한은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경계, 지방과 서울의 경계에 위치한 자였다.(293 페이지) 그는 좌절과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302 페이지)

 

신유한은 과거 시험에 도움이 되는 공부보다 선진(先秦)의 글을 배우라고 가르쳤다. 저자는 신유한의 문장을 조선 문단에서 최고의 문장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당시 문단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신유한은 조선의 경계 밖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경계를 열었다.

 

그는 조선의 경계 밖에서 욕망하고 투쟁하고 좌절하고 삶을 극복해낸 사람이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신유한은 연강 뱃놀이가 계기가 되어 알게 된 신유한 이상이었다. 그의 삶은 파란과 격정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출세를 위해 애쓰고 좌절한 그의 삶이 슬프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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