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우아함과 저속함
박진경 지음 / 새라의숲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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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우아함과 저속함’은 밀도 높은 책이다. 저자 박진경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양미학을 전공한 철학박사다. 우아함은 아(雅), 저속함은 속(俗)의 다른 이름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상아폄속(尙雅貶俗)의 아속관을 가지고 있었다. 상(尙)은 높이다, 숭상하다 등을 의미하고 폄(貶)은 떨어뜨리다, 낮추다 등을 의미한다.

 

아는 피지배층을 폄하하고 계도하려는 지배층의 배타적 용어다. 아문화는 지배문화, 속문화는 대중문화를 의미한다. 아는 정(正)으로 통했다. 속은 원래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애초 지방이나 주변 이민족을 뜻하는 개념이었으나 중심인 아에 의해 주변부로 부정되기 시작되었다. 아속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었으나 선진(先秦)시기 이후 가치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아속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다.

 

잠시 공자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집례와 같은 중요한 일이나 강론은 모두 아언(雅言)을 사용해 했다.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당시로서는 귀족에게만 전수되었던 육예(六藝; 禮, 樂, 射, 御, 書, 數)의 과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자에게 가르침으로써 3천 명에 이르는 제자를 양성(전호근 지음 ‘고전함께읽기’ 참고)한 공자다.

 

공자는 속을 비하하지 않았고 아와 속을 중요한 미학적, 도덕적 개념으로 대별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속인 대신 소인과 군자를 대별하거나 아악과 정성(鄭聲)을 대별하여 정성으로 대표되는 속악인 신악(新樂)에 대한 불편함 심경을 드러냈다. 공자가 자색[紫]이 붉은색[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고 정(鄭)나라 음악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만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집는 것을 미워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성은 정나라 음악이다.

 

‘시경’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텍스트는 민간의 노래를 지배층의 문화로 이끌어낸 대표적인 아속겸비(雅俗兼備)의 산물이다. 공자가 언급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최적을 찾아 시중(時中)을 구현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문과 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공자는 형식보다 내용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형식은 문이고 내용은 질이다. 인(仁)한 마음의 본질이 예(禮)라는 형식을 통해 조화롭게 드러나는 것이 문질빈빈이다. 문질빈빈은 공자가 군자의 도덕 수양에 관해 거론한 것이었으나 후에 문예에까지 개념이 확산되었다. 문이 질을 이기면 번드레하고 질이 문을 이기면 투박하다.

 

이속위아(以俗爲雅)는 아속관의 놀라운 전환이다. 이속위아는 속을 통해 아를 완성하는 것이다. 아속겸비의 회화는 감상과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회화를 의미한다. 양명학의 등장과 초기 자본주의의 발현은 예악과 정교사상을 무너뜨렸으며 양명학의 인간 본연에 대한 관심은 자기의지와 체험을 존중하는 개성적 문예풍에 주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대에는 문예 전반에서 자득(自得)이 새로운 심미표준이 되었다. 법고(法古)도 결국 창신(昌新)을 위한 기반이며 창신은 자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는 문예인식이 팽배했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철학적 관심이 물(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지향하는 사물에 있으며 리(理)란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도덕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준칙인 양지(良知)의 창조적 도덕 판단 및 작용에 의해 디양한 사물의 이치가 시의적절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심즉리는 모든 가치가 나의 마음에서 출발하므로 천(天)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人)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였으며 이것은 인간의 개성과 몸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졌다.(108 페이지)

 

조선 후기가 중요하다. 이 시기는 정치, 사회, 경제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요구되는 시대였다.(121 페이지) 이 시기는 한양에서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상업의 발달과 함께 물질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며 성리학적 이념만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질서를 해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123 페이지)

 

앞에서 자득 이야기를 했거니와 목은 이색(李穡)은 무엇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받고 스승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책에도 있지 않으니 자득해야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득은 요순 이래로 바뀐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선후기 문예사조의 아속겸비적 심미의식은 자득과 중화(中和)적 사유로 문예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심미의식이었다.

 

조선 후기 인식의 변화에 미수 허목(許穆; 1595 - 1682)이 미친 영향이 아주 컸다. 그는 선진(先秦)유학 정신으로 조선 유학을 쇄신하고자 했다. 허목은 천문, 지리, 노장 등 박학을 추구했다. 실학의 대두는 문예인식의 저변을 숭고(崇古)적 전아(典雅) 지향의 문예풍토에서 즉물적이며 시대의식이 담긴 개성적 문예의 흐름으로 바꾸었다.

 

성리학의 발전적 접근을 통해 리(理) 위주의 조선주자학의 보편주의에서 기(氣) 위주의 상황주의적 지향으로 나아간 실학의 현실인식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인 것이었다.(170, 171 페이지) 박지원은 당시 학자들이 학문의 본질을 망각하고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으로 명분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고 학문의 본질은 실용에 있음을 천명했다.

 

그는 시경과 서경은 매화를 말하며 실(實)만 논했지 꽃은 논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비근한 것으로 참신함을 추구하여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넓혀나갈 것을 제안했다. 박지원이 깨달은 것은 청나라의 제도에도 명나라의 전통이 섞여 있으며 명의 유제와 이적의 문화는 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명의 문화조차 원의 문화가 섞여 있어 순수한 중화가 아니었던 것처럼 관념에 있는 고상한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존재하는 것은 혼종 문화라는 것이다.(173 페이지)

 

나종면은 조선 후기 문예의 지향성이 고(古)에서 금(今)으로, 아(雅)에서 속(俗)으로, 법(法)에서 아(我)로 전환하였다고 보았다.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 - 1737)은 문(文)과 도(道)를 분리했다. 그는 문장의 묘란 샘물의 따뜻함과 같고 불의 차가움과 같으며 돌의 결록과 같고 쇠의 지남철과 같다고 보았다.(197 페이지)

 

그는 "...그러므로 함께 물(物)을 보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빌려온 적이 없고 함께 소리를 듣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청각을 빌려온 적이 없다. 그런즉 유독 식견과 깨달음에 있어서 머리 숙여 고인의 노예가 되라고 한다면 도리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211 페이지)란 말도 했다.

 

하늘은 “형체로 말하여서는 천(天)이라 하고 성정(性情)으로 말해서는 건(乾)이라 하고 주재(主宰)로 말하야서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에 대해서는 신(神)이라 한다.”는 말을 한 박지원도 주목할 만하다.(206 페이지) 박지원은 주자학이 일구어낸 우주론을 거부했다. 그가 진정 거부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정신을 규제하는 이념과 고정관념이었다.

 

창신(昌新)대한 열망은 기(奇)의 추구로 이어졌다. 담헌(澹憲) 이하곤(李夏坤; 1677 - 1724)은 일원 이병연과 겸재 정선이 기이한 곳을 찾아다니며 창작을 했고 이병연의 시는 실제 경치보다 더욱 기이함을 자아냈다고 칭송했다.(홍대용도 담헌이라는 호를 썼다. 홍대용의 담헌은 湛軒이다...澹은 담백할 담이고 湛은 즐길 담, 탐닉할 담이다.)

 

이가환의 아버지이자 성호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는 기를 추구하면서도 기의 절제도 강조했다. 그는 시는 진실로 기해야 뛰어난 것이지만 기에만 힘쓴다면 그 폐단은 두묵처럼 될 것이라 말했다. 진(眞)과 기(奇)는 당대 고법에서 생산하지 못한 참신성을 의미했다. 고금통변(古今通變)은 아속겸비적 심미의식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문학의 혁신을 주도하였다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회화의 혁신을 주도했다.(234 페이지) 속화(俗畵)는 문인화의 상대개념이기도 했고 풍속을 그린 그림이기도 했다.(237 페이지) 동계 조귀명은 윤두서의 풍속화에 대해 속된 그림을 그렸는데 속된 필치가 없으니 이것은 썩은 것을 변화시켜 신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평했다.

 

윤두서가 초기 풍속화로서 과도기적 흔적을 남겼다면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은 풍속화의 난만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진 제작에 참여하라는 어명을 받았으나 사대부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부했다. 1748년 영조가 숙종의 어용을 그리는 일에 참여를 명했을 때 영조의 노기 어린 질책에도 불구하고 거부한 것이다.

 

그의 화집인 사제첩(麝臍帖)의 사제는 사향노루 배꼽 향기를 의미한다. 귀하고 비밀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과 세상에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없는 기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의미한다. 조영석은 아속겸비적 심미의식을 가진 대표적 문인화가다.

 

심노숭(沈魯崇; 1762 -1837)은 물 하나 그리는데 열흘, 바위 하나 그리는데 닷새가 걸리는 산수화에 담긴 허위의식을 꼬집고 이용후생적 관점에서 풍속화를 긍정했다. 그는 리(理)가 지배하는 정태적 세계관으로 예술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실용의 세계, 동태적 세계관으로 예술을 바라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정조의 경우다. 정조는 풍속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장려했다.(252 페이지) 잘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고동(古銅)의 취미를 속학의 영역으로 보고 질타했다.(276 페이지) 풍속화의 속(俗)과 속학의 속(俗)은 같은 것인데 풍속화는 장려했고 속학은 질타한 것이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 - 1791)이 眞境, 眞景으로 말한 진경산수화는 이상적 산수관과 현실 산수가 잘 융합되어 있는, 아속겸비적 산수화관의 미의식을 보여준다.(256 페이지) 단원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60세가 넘어 영조에 의해 영릉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진경산수화는 전통산수화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실존하는 산수를 재창조했다.

 

겸재 정선이 물려받은 것은 김창협 문단의 천기론적 개성주의이고 아속겸비적 문예관이다. 기질지성의 긍정과 천기의 강조는 기를 더 이상 국한성과 한계성의 부정적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개별성과 경험의 특수성, 실증적 현실성, 개체의 실존을 담보하고 긍정했음을 의미한다.(279 페이지)

 

조선 전기의 천기는 성정지정(性情之正)을 의미했고 후기의 천기는 성정지진(性情之眞)을 의미했다. 조선 후기의 천기론은 문학, 회화, 서예, 더 나아가 문예전반의 예술 창작론으로 발전했다. 천기는 자연성, 자발성과 연관되므로 의고(擬古; 옛것을 본뜸)풍의 전아한 문예와는 지향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발성을 의미하는 천기는 자유를 추구한다.(287 페이지)

 

진(眞)의 추구는 문예를 아와 속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한다.(288 페이지) 정조는 속학의 핵심을 소품문으로 지목하여 신문체는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폐단이라고 규정했다.(310 페이지) 정조의 문체반정은 북학과 서학 사이에서 정치적 고민을 전환하기 위한 방편이자 남인을 서학이자 사학(邪學)의 원흉으로 몰아가려는 노론에 대응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송대 이후 심즉리를 주장하는 양명학은 즉물하는 모든 대상을 학문과 예술의 세계로 인도했고 도덕적 세계 너머의 인간을 발견하게 했다.(321 페이지) 실(實)은 양명학과 실학의 핵심어다. 윤두서는 이런 실의 정신을 문예의 핵심으로 삼고 실득의 문화의지로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로 자화상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자득은 창작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을 말한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명확한 자기인식 없이는 불가능하고 자기인식은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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