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의 지리학 - 2020 전국지리교사모임 추천도서
이경한 지음 / 푸른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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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한은 ‘자리의 지리학’에서 자리를 곳, 장소, 흔적, 위치, 지위, 물건 등으로 정의한다. 이 책을 통해 자리란 명분(名分)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명분은 명의(名義; 명분과 의리)나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도의상의 본분(本分)을 일컫는 말이다. 아울러 생태적 지위라는 의미의 니치(niche)란 말도 생각하게 된다.

 

자리는 상징이 투영되는 곳이다.(26 페이지) 사람들이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상징을 만드는 것이다. 자리는 따라야 할 명분과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한다. 경운궁(덕수궁)에 즉조당(卽堂)이 있다. 인조가 즉위한 곳이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다. 조()는 오른쪽 계단, 사당 동쪽 섬돌을 의미한다. 조계(階)라고도 한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조계는 오직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즉 주인만이 오르내릴 수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더라도 서쪽 섬돌을 경유한다고 썼다.

 

사람들은 사고를 반영하여 상징을 만든다. 그런데 그 상징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자리로 재현되어 사람들의 삶을 지배, 구속하는 경향이 있다.(31 페이지) 자리는 질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구별짓기 행위이기도 하다. 자리는 사회의 일정한 규칙 즉 지배질서를 반영한 결과다.

 

개인이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와 개인이 속한 사회구조에 의해 산출되고 내면화하는 성향, 사고, 인지, 판단 등의 행동 체계를 아비투스라 한다. 한 집단의 아비투스가 다른 집단에게는 상징폭력이 될 수 있다. 자리를 상대적 가치로 전환하려는 무리는 자리를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실제와 다른 의미나 가치를 자리에 부여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감추려는 본능을 지닌다. 즉 자리를 부(富)라 말하지 않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41, 42 페이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그 주위를 이어주는 사통팔달의 방사상(放射狀; 바큇살 모양) 도로는 지배 권력의 자리를 공간에 표현한 대표적 사례다. 파리에는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방사상으로 펼쳐져 있다. 별 모양으로 보여 이름이 에투알(Etoile; 프랑스어로 별을 의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왕을 본 프랑스 권력자들은 자신들만은 민중에게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파리의 도심도로를 가장 잘 감시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권력을 잡은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봉기를 통제해야 했기에 나온 디자인이 방사상 구조다. 파리에서 시민이 봉기하면 12개의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때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 적은 수의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2016년 11월 6일 중앙선데이 수록 유현준 글 ’800m 간격 테헤란로 걷기 싫어지는 까닭‘ 중에서)

 

모든 존재는 자리를 잡아 영역을 구축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자리에서는 끊임없이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리의 사건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억을 만든다. 그 기억은 의미체가 되어 자리를 상징으로 만든다. 지금도 우리는 자리의 상징성을 만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자리가 가진 상징성을 타자와 나눈다.(76 페이지)

 

생태계도 자리다. 생태계라는 자리는 희생과 생존이라는 틀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종이 보존되는 체계다. 하지만 어느 한 종의 가혹한 희생만을 강요할 때 생태계의 종 다양성은 무너지고 만다.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에게도 늦게이지만 희생의 때는 온다.

 

알도 레어폴드는 ’모래땅의 사계‘에서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썼다.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어느 종은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고 어느 종은 죽음을 맞았음을 의미한다. 애도를 표하는 종이 인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집밥 신드롬을 자리의 기억과 그 기억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라 표현한다. 집은 그리스어로 오이코스다. 이는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 단위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오이코스를 사회적 그룹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한다. 바이트는 오이코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다.

 

저자는 자리를 배제하고서 삶을 논하기는 어렵기에 일상에서 자리의 지리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리로 경계를 짓는다. 이 경계를 중심으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대재생산한다. 이로써 차별성이 강화되고 경계가 공고화된다. 경계는 그러나 다른 자리가 존재할 수 있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경계를 지음으로써 서로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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