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만 틸든은 ‘숲 자연 문화유산 해설’에서 "해설의 기본 목표는 상세한 부분이 아무리 흥미 있다 하더라도 부분보다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총체가 아니라 전체에 주목할 것이다.“(81 페이지)란 말을 했다. 저자는 총체는 무한대로 솟아오르는 것이라 말한다.

 

전체(全體)와 총체(總體)는 어떻게 다를까? 가뭄으로 마을 전체가 황폐화되었다고 하면 괜찮지만 마을 총체가 황폐화되었다고 하면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작품은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의 총체라고 하면 괜찮지만 전체라고 하면 이상하다.

 

전체적이라 함은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총체적이라 함은 전면적이고 전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꽃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꽃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꽃의 역사, 지질, 생태, 인문적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시간 제약 때문이다.

 

나로서는 대략 이 정도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이 허튼 데가 없이 찬찬하며 실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착실(着實)이다. 철학적으로 이는 실지(實地)에 발을 붙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착실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나는 보허(步虛)가 아닌가 싶다. 허공을 걷는다는 의미다.

 

나는 착실한 해설을 하는가? 아니 착실이 원래의 의미(‘실지; 實地‘에 발을 붙이고 있는 상태)를 잃고 허튼 데가 없이 찬찬하다는 말로만 쓰이는 현실을 고려해 ”나는 성실한 해설을 하는가?“라 고치면 어떨까? 아니 이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실답(實踏)의 해설을 하는가?“라 고쳐야겠다. 부분보다 전체를 말하는 해설인가란 의미다. 그런데 가령 오규원 시인의 시 '바위에 별이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란 구절을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암석(지질), 별(천문), 꽃(생태)을 두루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순자‘에 이런 말이 있다. 만물이 비록 많으나 어느 때는 이들을 한꺼번에 거론하고자 할 때가 있고 이를 일러 물(物)이라 한다. 물이라는 것은 가장 큰 공명(共名; 공통 개념)이다....어느 때에는 개별적으로 거론하고자 할 때가 있으니 예를 들어 조수(鳥獸)와 같은 것이다...조수라는 것은 가장 큰 별명(別名; '종; 種' 개념)이다..”

 

순자는 말을 좋아하고 말을 잘 하는 것을 군자의 본질로 여겼다. 순자는 말의 내용이나 실속 만큼 드러내는 방식, 표현 과정도 중요하게 여겼다.(김선희 지음 ’실(實), 세계를 만들다‘ 참고)

 

인간은 악의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는 주장(성악설)을 폈지만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 순자(김백철 지음 ’왕정의 조건‘ 참고)의 말이니 믿음이 간다.

 

본지(本旨)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말하자면 ”순자의 성악설이 맹자의 성선설과 모순되는 이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상가는 인간 본성 가운데 상이한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서로 다른 입장에 섰으나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은 많은 곳에서 일치하는 유학자였다.“(김교빈, 전호근, 김시천, 김경희 등 지음 ’동양철학 산책’ 참고)

 

공명(共名)과 별명(別名)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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