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 착한 그림, 선한 화가
공주형 지음 / 예경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박수근이 아내가 된 김복순씨에게 한 청혼을 착한 청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주형은 박수근론으로 박사가 되었고 일간지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로 미술평론을 하고 출강하고 있다.

 

박수근 화백은 1965년 52세로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대 멀어, 멀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은 경기도 포천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고향 양구로 옮겨졌다.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어 한 화가였다.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창신동 집을 마련했다.

 

타계할 때까지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색은 흰색이었다. 박수근은 미국인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흰색을 자주 언급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다. 석가에게 보리수가 있었고 뉴턴에게 사과나무가 있었듯 박수근에게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어린 수근에게는 마땅한 화구가 없었다. 그래서 수근은 뽕나무 가지를 태워 직접 목탄을 만들기도 했다. 양구 보통학교 언덕에 있던 느릅나무를 보고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를 꿈꾸었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박수근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수근의 상심을 달래준 사람들이 해외의 인물들이었다.

 

밀러 부인은 박수근에게 “서울 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박수근은 후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어 자신이 국전에서 정실(情實) 인사 때문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박수근은 국전 심사를 맡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존의 전쟁이 시작된 그해 수근은 혜화동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이상우의 주선으로 미군 범죄수사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수근은 페인트칠하는 노무자 대우를 받고 일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수근은 부두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수근은 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피엑스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수근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아내는 박수근에게는 흰쌀로 정성껏 지은 밥을 내놓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옥수수와 보리쌀로 지은 밥을 내놓았다.

 

박수근이 태어난 1914년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화를 처음 소개하고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발족하는 등 서양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때였다. 12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장프랑수아 밀레; 1814 - 1875)의 '만종(1857 - 1859년 사이 그림)'을 본 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1904 - 1969)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 '만종'이 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농민 부부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슬프고도 무서운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감자 바구니 아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밀레 생존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으면서까지 피폐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밀레가 장례식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 감자바구니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했다. 나무관 하나만으로는 그림 전체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1940년대 박수근은 평양에 있었다. 춘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미요시(三吉)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이직하면서 마련해준 일자리 때문이었다. 그즈음 박수근은 흠모하던 이중섭도 만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도 그때였다.

 

박수근은 받을 돈을 재촉하지 못하고 남에게 받은 것은 버스표 한 장이라도 꼭 갚았다. 가난한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타계 직전까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박수근 그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마거릿 밀러, 마리아 핸더슨, 실리아 짐머맨 등이 박수근의 후원인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은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다. 박수근은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소도 그렸다.

 

1957년 박수근은 국전 낙선을 계기로 시작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반복은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수근이 세상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가장 떳떳한 수단이었고 수근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수근은 이렇게 청혼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의 아내는 춘천여고를 졸업한 후 철원무진공사의 직원과 금화군의 수의사에게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난한 화가를 택했다. 수근은 종종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두 살 아래의 이중섭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이라 불렀다. 수근은 바탕칠도 대충 하지 않았다. 수근이 처음부터 그림에 특유의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박수근의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화강암의 효과를 나타내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거칠지만 소박하다.

 

이 화풍의 시작은 박수근이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 기법을 연구한 후 완성한 일명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였다.(이코노미톡 뉴스 수록 기사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마티에르, 알고 보니 경주 마애불과 석탑이 원천’) 고향 양구의 화강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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