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측체의 - 기 철학과 서양 과학의 행복한 만남 청소년 철학창고 30
이종란 지음 / 풀빛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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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惠崗) 최한기(1803 - 1879)의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기(氣)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얼핏 제목만으로는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최근 읽은 한 책에 의하면 터 잡기 예술과 지식체계로 나뉘는 풍수에서 후자의 경우 기(氣)는 중요하게 처리되지 않는다.(전종한, 서민철, 장의선, 박승규 공저 ‘인문지리학의 시선’ 참고)

 

최한기에게 기는 이기론에서 말하는 기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를 해석하고 조망하는 가장 큰 틀이다.(김선희 지음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263 페이지) 혜강의 기는 비근하게 말하면 사람 이전에 먼저 자연 속에 있다가 사람의 몸이 생기면 그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연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기측체의’ 31 페이지)

 

혜강이 보는 질(質)은 기가 단단히 엉겨 굳은 것이다.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가운 것으로 풀이하지만 비유하자면 혜강에게 기는 빗물, 질은 얼음이다. 어떻든 기는 공기와 다르다. 공기는 아무리 모여도 물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만물의 근원을 기로 보았다. 최한기는 기가 아니라 질의 차이에 의해 나무, 돌, 사람 등이 다르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신 대신 신기(神氣)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좋은 책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끼지 않고 사들이고, 독파한 뒤 오래 된 책은 헐값으로 팔았으며 다 전하지 않지만 평생 천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김선희 지음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259 페이지) 무수히 많은 책을 접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기측체의’에도 다양한 책이 인용되었다. 최한기는 기(氣)가 리(理)의 근본이라 주장했다는 점에서 주자 성리학자들과 달랐다. 주자 성리학에서는 공히 실체인 기와 리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섞이지도 않는다고 보았다.(최한기는 리를 실체가 아니라 보았다.) 최한기는 리는 기로 이루어진 사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직접 경험하거나 파악될 수 없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법칙이 사물보다 먼저 있거나 독립해 있다는 견해를 비판했다. 최한기는 성리학의 리(理)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유행지리라는 말을 만들어 법칙 또는 자연의 원리를 말할 때만 사용했다. 추측지리는 인간이 추리하고 판단한 결과 생긴 학설이나 윤리를 말한다.(‘추측; 推測’은 추리와 판단의 결합어이다.) 최한기는 인간은 형질(육체)과 신기(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또한 신을 기의 정화(精華)로 보았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불의 밝음은 기름의 정화이며 기름은 불의 바탕이라는 말이다. 성리학에서는 인의예지를 하늘의 이치로 본 반면 최한기는 인간의 육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이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최한기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즉 선악은 본성에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자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일 선하든 악하든 인간의 심성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운명적인 것으로 행동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인간의 정이 일곱 가지이지만 크게 나누면 좋아함과 싫어함 두 가지라 보았다. 최한기가 처음 안 천문학 지식은 천주교의 신학관인 천동설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로부터 벗어났다. 최한기는 마음과 앎을 분리했다.

 

경험 이전에 마음에 온갖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본 성리학이나 양명학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대개 앎이란 내가 밖으로부터 얻어온 것이지 마음속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한기는 사람의 공부는 오직 자신에게 여러 냄새가 찌든 것을 없애는 데 있다고 보았다. 최한기가 사용하는 신기란 자연과 인간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마음이면서 인간의 인식 주체, 반사운동을 주관하는 무의식 등을 두루 의미한다.(113 페이지)

 

경험 외에 앎의 방법으로 추측이 있다. ‘추측록’은 추측에 관한 책이다. 최한기는 인간의 마음을 원래 맑은 것으로 보고 인간의 경험을 샘물에 물감을 넣는 것에 비유했다. 최한기는 주자(朱子)는 많은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추측의 큰 작용을 찬미한 것이지 결코 만물의 이치가 본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했다.

 

사람들의 모든 이치를 하늘의 이치라고 여긴 사회에서 그런 이치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 주장한 최한기의 사유는 당시 지배층의 주목을 받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한기는 사랑과 공경이 맹자가 말한 선천적 능력인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에서 나왔음은 인정했지만 경험이나 추측 없이 윤리적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는 윤리와 도덕이 자연 속에 없다는 말로 자연과 인간을 구별했다. 이는 자연법칙인 천리 속에 인간 윤리의 영원성이 들어 있다는 성리학의 주장을 정면 부인하는 것이다. 천리 속에 인간 윤리의 영원성이 들어 있다는 말은 인간 윤리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리학자들이 천리 즉 리(理)를 높이 여기고 기(氣)를 아래로 본 것은 당시의 신분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신분 제도는 하늘이 준 불변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최한기는 사물을 살피는 다섯 가지 방법을 이야기했다. 1)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2) 주체인 나의 입장을 떠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3) 주체인 내가 직접 사물을 탐구하는 것, 4)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주체인 나를 살피는 것, 5) 밖의 대상과 관계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증험(證驗)도 이야기했는데 이는 내가 사물을 제대로 아는 것인지,

 

사물의 물리를 가지고 내가 아는 것이 거기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앎이란 바깥의 정보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전의 지식과 정보 또는 내면에 확립된 일정한 기준이나 범주를 가지고 비교, 검토, 검증하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최한기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말류의 폐단을 노출하여 떳떳한 가치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음을 근거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자연사물의 법칙인 유행지리를 성리라고 불렀다. 최한기는 주공(周公)과 공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지 않았다. 그들의 말도 시대 변화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뿐 아니라 전통 유학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종교도 학문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서양 종교를 서학(西學)이라고 불렀다. 성리학은 인간의 욕심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불선으로 흐를 수 있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는 자연은 그 자체 질서에 의해 움직이지 인간적 윤리나 도덕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자연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자연이 인간과 만물의 고향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다윈에 앞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관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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