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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
이정미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0년 4월
평점 :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사회개혁가, 실천적 페미니스트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부흥운동을 통해 근대 여성 해방운동의 역사적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웨슬리는 1787년 10월 멘체스터 감리교 연회에서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로서의 출현을 승인했다. 감리교의 여성해방운동은 북미 성결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정미의 책 ‘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은 감리교 전통의 열 명의 여성을 다룬 책이다. 첫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다. 웨슬리는 어머니 수잔나를 통해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산 교훈을 얻었다. 수잔나는 아들 웨슬리의 사상 형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수잔나는 웨슬리가 감리교인이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감리교인이었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 속에서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들을 승인한 것은 어머니 수잔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성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물은 존 웨슬리의 영적 후원자 셀레나 헤이스팅스다. 웨슬리나 감리교회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감리교의 관계다.
지난 2017년 보도이지만 영국 감리교와 성공회가 18세기 이후 200년 이상 갈라져온 교회 역사를 통합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사실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였다. 세 번째 인물은 감리교 여성 설교자의 원형인 메리 보산퀫 플레처다. 네 번째 인물은 감리교 최초의 비공식 여성 설교자 사라 크로스비다.
다섯 번째 인물은 감리교 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인 레이디 맥스웰이다. 이 분은 플록의 부유한 남작부인으로서 주일학교의 설립자이며 헌팅턴의 셀레나 백작부인과 함께 웨슬리를 비롯한 많은 감리교 지도자들의 영적 카운슬러였다. 레이디 멕스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그녀가 감리교회에 입회한 것은 1764년으로 이 해에 웨슬리와 레이디 맥스웰이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섯 번째 인물은 파운데리 신도회의 엘리자베스 리치 몰티모어다. 이 분은 웨슬리와 함께 순회설교여행(itinerant preach trip)을 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십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일곱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여성 순회설교자 헤스터의 앤 로우 로저스다. 이 분은 이사야 40장 본문(“내 백성을 위로하라“)을 설교를 통해 듣고 감흥을 얻었다.
여덟 번째 인물은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 사라 말렛이다. 감리교 역사상 처음으로 멘체스터 연회에서 공식적 여성 설교자로서 승인을 받은 인물이 사라 말렛이다. 당시는 여성은 교회 내에서 잠잠하라는 성경(고린도전서 14장 34, 35절)을 근거로 여성들의 설교를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1786년 웨슬리가 사라와 면담을 통해 그녀의 소명(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설교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증했다. 아홉 번째 글은 메리 테프트와 여성 설교자 임명에 관한 감리교회의 반대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 열 번째 글은 페베 팔머(Phoebe Palmer; 1807 - 1874)와 성결주의 운동이란 글이다. 페베 팔머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란 구절(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금지한 것은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 교회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며 여성이 공중에게 가르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만일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금했다면 사도행전 18장 26, 27절이 증거하는 사례 즉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에게 예수의 복음을 가르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팔머는 성경의 여성 선지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사 시대의 드보라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 예언자 훌다 및 초대교회의 신실한 동역자인 유오디아와 신디케 등의 주목할 만한 여성 지도자들의 실례를 들면서 여성 사역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후원을 호소했다.
팔머는 성경적 근거에서 설교와 예언은 분리할 수 없는 복음서이며 그런 단서는 오순절 사건의 성령 강림의 역사에 있다고 강조했다. 팔머는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무시될 수 있는 기사입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쓸 때 예수의 부활하심을 맨 먼저 증거한 여자 증인들도 그들과 함께 회개하며 탄원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천사의 입술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들었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세상의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 사도들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팔머가 여성 목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성구로 든 구절은 사도행전 2장 3, 4절이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팔머는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여성의 참정권과 금주에 대해 캠페인을 벌인 동역자 프랜시스 우리라드와 함께 노예 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마지막 순서로 언급된 페베 팔머는 인상적인 인물이다. 성경 해석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페베 팔머는 바로 가부장적인 전통으로 뭉친 교회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구절을 들어 멋진 해석을 해낸 인물이다.
두 가지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모두 하이젠베르크가 한 말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어느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이론이 일관성이 있다거나 명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론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일에 참여해보겠다는 희망에서인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자는 바람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길을 혼자 더듬어 가는 것이다.“(‘입자, 인간, 자연에 대한 단상’ 16 페이지)라는 말이 그 하나다.
”과학의 역사는 비단 발견과 관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개념의 역사이기도 하다.“(같은 책 23 페이지)는 말이 다른하나다. 과학이란 말을 기독교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성경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일이 필요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