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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 - 땅과 사람의 기록으로 보는 시대상
정치영 지음 / 푸른길 / 2021년 2월
평점 :
정치영(丁致榮) 교수의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은 조선시대의 주요 지리지들을 활용해 오늘의 참고점을 모색한 책이다. 오늘날의 지역성이나 지역 구조가 과거의 그것에 기초해 형성되었기에 과거의 지역지리학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지역을 고찰하고 미래의 지역을 예측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12 페이지)
조선 시대에 제작된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관찬(官撰) 지리서,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의 사찬(私撰) 지리지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24년 세종이 대제학 변계량에게 지지(地誌) 및 주, 부, 군, 현의 연혁을 편찬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것에서 비롯된 책이다.
여지도서는 1757 - 1765년 사이에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 후기 들어 간행된 지 270년이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고치고 그간 달라진 내용을 싣기 위해 1757년(영조 33년) 홍양한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간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인식하는 데에 이원적인 인식 체계를 보였다. 산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하천을 중심으로 한 체계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산경표이고 후자의 대표적 예가 정약용의 대동수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기도의 대천(大川; 주요 하천)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꼽았다.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다.
산은 산(山)이나 봉(峰)으로 명칭이 나뉘었지만 하천은 매우 다양했다. 강(江), 천(川), 수(水), 포(浦), 탄(灘), 도(渡), 진(津) 등이다. 또한 산은 하나의 이름을 갖는 데 비해 하천은 지류뿐 아니라 본류의 경우에도 구역이나 장소마다 다른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온난습윤한 기후 조건과 함께 토양의 모재가 되는 암석 중 화성암인 화강암과 화편마암이 전 국토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그래서 토양 종류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토양 종류가 많은 편이다. 점토질 토양은 사질 토양보다 비옥하다. 오늘날은 토양 구조, 점성(粘性), 토양색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조선시대는 토양의 비옥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제주도의 토성을 부조(浮燥)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가벼워서 건조하면 바람에 날리기 쉬운 화산회(火山灰) 토양의 물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척박(瘠薄)한 땅으로 분류된 곳 가운데 삭녕, 연천, 마전 등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절대 고도보다 주변보다 우뚝 솟아 있는 땅을 산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천을 제사 장소로도 여겼다. 이런 신성한 하천을 규모와 무관하게 대천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읍치(邑治)는 수령에 의한 지방 지배 기능과 재지세력에 의한 자치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 행정적 중심지였다. 연천의 읍치는 연천군 읍내리에 있다가 1910년 연천군 차탄리로 옮겨졌다. 연천읍의 읍치는 군자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동쪽으로 차탄천을 바라보며 남동향으로 열린 골짜기 안에 들어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아(官衙)는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명당)에 자리했다. 조선은 국가 지도 이념인 유학(儒學)을 온 백성에게 보급하기 의해 1읍 1교(1邑 1校)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없어졌고 군현이 생기면 향교도 생겼다.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마을을 촌락(村落)이라 하고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마을을 도시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행정, 군사, 경제,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읍치가 도시에 가까웠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촌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을 중요시한 것은 그만큼 산이 많기 때문이다.
촌락은 북쪽의 산과 언덕에 기대어 산과 평지가 만나는 완경사면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했다. 이는 장점이 많다. 북쪽의 산이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아준다.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 지하 수면이 낮아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천 범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큰 강변의 평야지대보다 골짜기나 분지가 벼농사에 유리했다.
우리나라는 괴촌(塊村)이 많았다. 괴촌이란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을 말한다. 대다수의 촌락은 집단 이주에 의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두 가구로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졌기에 계획적인 가옥 배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지가 한정되었고 더욱 명당은 제한적이기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집촌해야 하는 벼농사 중심의 체계도 한 몫 했다.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족촌(同族村)이 많은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토지에서 나는 소산(所産)을 토의(土宜)라 했다. 토공(土貢)은 공물을 말한다. 지리지마다, 지역마다 산물의 표기가 달랐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지도서에는 미역이 나는 군현으로 55개 지역이 기록되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두 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광물 자원이 다양할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이를 이용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광물을 감정하고 탐사하는 방법이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발달하여 주요 광물인 철, 납, 아연, 금, 은 등의 광상(鑛床) 개발이 촉진되었다. 광상은 유용 광물의 집합체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지리지가 토의(土宜), 광상(鑛床) 등에 관한 항목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백성의 어려움이 컸으리라 보인다. 백토는 고령토라고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토 산지가 한 곳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지도서에는 더 많은 곳이 기록되었다.
경상도 진주목, 평안도 구성, 선천, 함경도 길주, 단천, 종성도호부 등이다. 송이버섯의 경우 29곳이 늘었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여지도서에서 크게 준 항목도 있다. 옻나무(354 페이지), 닥나무(378 페이지) 등이다. 조선을 문적(文籍)의 나라라 한다. 그렇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