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개인적 차원이지만 최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되었다.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그들과의 대화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했지만 아쉬움도 느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내 지식 또는 과학으로 기독교를 분석하는 내 방식에 불편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문제는 지식 특히 과학 지식이 많은 사람을 신앙심이 없는 부류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으려면 가끔씩이라도 하나님, 아멘, 주님 등의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신성한 존재를 느끼는 데 관심이 있다. 이런 내 지향성과 공명하는 책이 ‘지질학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같은 책이다. 어떤 내용이 펼쳐졌을지 큰 궁금증을 자아내는 책이다. 합리적인 부분이 있으면 수용할 생각이다.
각설하자면 성경과 자연을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으로 놓고 이야기를 펼친 책이 있다. 우종학 교수의 ‘과학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응답’이다. 저자가 전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1)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의 저자는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될 수 없다.(32 페이지) 2) 과학은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현상을 읽은 내용인 동시에 다양한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과학의 다른 설명들과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인과적 설명 체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34 페이지)
3) 과학은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발전할수록 자연의 참 모습을 점점 더 정확하게 밝힐 것이다.(37 페이지) 4) 과학은 자연에 대한 영원한 근사(近似)이지만 그럼에도 창조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비밀들을 드러내주는 유용한 도구다.(38 페이지) 저자는 과학이 자연을 100%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는 나이브한 실재론이나 자연의 참모습과 상관 없는 주장일 뿐이라는 상대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과학이 자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용하게 드러낸다고 보는 비판적 실재론을 지지한다.(38 페이지)
본문에 기록된대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과학으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려는 노력 자체를 불편하게 느낀다.(77 페이지) 과학은 새로운 데이터나 이론, 발견 등의 출현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가변적 학문이지만 그렇다고 마구 바뀌는 학문은 결코 아니다.(82 페이지) 이에 나는 경험이 인식 수준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지배하는 규칙성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과학은 경험적인 대상만을 다루기에 초자연적인 신 존재나 섭리 등을 본질적으로 다룰 수 없다.(83 페이지) 과학은 중립적인 반면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기에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의미이고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은 연구비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에 따라 방향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큰 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은 사회적 차원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는 진화론은 목적이 없지만 사회진화론은 인간(단체)의 의지가 투사되어 목적을 장착했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성경은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106 페이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근동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상식이었으며 동시에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우주관이기도 했다.(109 페이지) 성경은 창조주를, 자연은 창조세계를 보여준다.(115 페이지)
저자는 성경과 과학을 합리적으로 조화시켜 보려는 노력을 일치론적 해석이라 칭한다. 일치론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여전히 과학 교과서처럼 읽음으로써 성경 본문의 기술과 과학의 내용을 조화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가정들을 자꾸 만둘어내게 된다.(122 페이지) 비일치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포괄적 서술로 해석한다.(124 페이지)
성경이 창세(創世) 사실을 비유적으로 즉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기술했다고 해서 창세 사실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창조 기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창조 기사를 허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126 페이지) 설득력 있는 말이다. 저자는 과학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고 말한다.(127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다루는 내용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철학적 해석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134 페이지)
저자는 과학주의 무신론의 공격에 대해서는 지성적 접근을 하라고 권한다. 자자는 그들의 주장에 귀기울이라는 말을 한다. 그들의 주장을 믿고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냉철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이 어떤 점을 잘못 이해하는지 파악해 그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역사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광해군 이야기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폭군(暴君) 또는 혼군(昏君)으로 알려진 광해군이 재평가된 것은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로 인해서이다. 그는 광해군의 미덕을 새삼 일깨웠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하며 일부에서 이나바 이와키치의 발언이 자신들의 대조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기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광해군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수용하되 이나바 이와키치의 의도를 간파해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가?란 것이다. 더욱이 일본인 학자가 주장했다고 해서 맞는 이야기임에도 폐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설령 이나바 이와키치의 의도에 빠져든다고 해도 일제 강점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지금 어떻게 그 인식을 실천하겠는가?(역사 이야기 시간이 아니어서 이만 줄임)
저자가 천문학을 이야기한 부분이나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포리아를 지적한 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지의 사실이기에 상술하지 않는다. 짧게 언급하자면 인간을 포함해서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탄소를 비롯한 다양한 원소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으며(140, 141 페이지) 핵융합 반응의 재료가 되는 수소나 헬륨 등은 어디서 기원했을까?(142, 143 페이지) 저자는 무(無)를, 공간은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는 빈 공간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양자역학에서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럼 공간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묻는다.(147 페이지)
오늘날 과학이 밝히지 못한 내용이라고 해서 앞으로 몇 백년 뒤에도 밝힐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리 지혜롭지 않지만 현대 과학이 물질의 기원을 엄밀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147 페이지) 저자는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하며(148 페이지) 도킨스의 주장(”신은 누가 만들었는가?“)에 담긴 허점을 지적한다. 도킨스의 주장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물질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만들어냈다면 그 물질은 누가 만들었는가?(149 페이지) 또한 자연법칙은 어떻게 기원했는가?(154 페이지) 저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그래서 에너지와 물질이 존재한 것이라 말한다.(157 페이지) 또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뒤에 우주가 스스로 운행되도록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주를 붙들고 다스리면서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가 운행되도록 섭리하고 있다고 말한다.(158 페이지)
과학만으로 기독교 신앙과 과학주의 무신론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해도 과학을 넘어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포함하여 전체 우주에 관한 질문들을 던져본다면 무신론의 설명보다 유신론의 설명이 훨씬 더 포괄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맑시스트 테리 이글턴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종교보다 더 큰 해악인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침묵한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글턴의 지적은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생각임을 절감했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해석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자연현상이 과학으로 설명된다면 무신론이 되는가?라고 묻는다. 신은 필요 없게 되는가?란 질문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여전히 자연현상을 붙들고 섭리하고 계신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나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일어난 첫 창조의 시점에서 끝나지 않았고 긴 시간 계속되었음을 과학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아퀴나스도 이런 생각을 피력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계속적 창조는 범재신론이나 과정신학의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202 페이지) 존 폴킹혼은 자연법칙을 통해 섭리하시며 인과율에 따라 새로운 창조물들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즉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이 강조된다고 이해한다.
폴킹혼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계속적 창조는 내재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나는 지구가 1만년전에 창조되었고 인간과 공룡이 함께 존재했다고 보는 창조과학을 잘못이라 생각한다. 지구가 1만년전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젊은 지구 창조론이라 한다. 많은 지성인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과학 때문이다. 그들의 젊은 지구론을 수용하려면 지질학, 천문학, 대기과학, 생물학, 물리학 등 상당히 많은 과학을 포기해야 한다.(217 페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을 기뻐해야 하지만 복음과는 상관 없이 자기 잘못으로 고난받는 것은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219 페이지) 우리가 태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조금 있다고 해서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낸다는 사실이 무너지지 않는다.(225 페이지) 창조과학회가 제시하는 지엽적인 반증들이 설령 과학적인 가치가 있다 해도 젊은 지구론을 지지해주지 않고 자연계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다양하고 놀라운 새로운 지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무 때나 반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 이론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대안이 요구될 때반증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226 페이지)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개념을 많이 접한다. 오랜 지구 창조론이 그 중 하나다.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결과는 수용하지만 생물진화는 부정하는 입장이다.(236 페이지)
기독교의 여러 창조론 가운데 ‘날 - 시대(day - age theory)’ 이론이 있다. 성경 창세기의 하루를 100만년이나 10억년처럼 오랜 기간으로 보되 창조의 순서는 성경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셋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고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된다는 창조 기사는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에 식물이 창조되어 10억년 동안 생존해야 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오랜 지구론이나 젊은 지구론은 모두 생물 진화를 반대하는 반진화 운동의 창조과학 흐름 안에 있다.(257 페이지)
진화적 창조론은 과학 발전 과정과 성경 해석의 역사를 반영한다. 물론 이는 과학 발전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를 낳게 된다. 저자는 성경 자체와 나의 성경 해석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나의 성경 해석도 계속 변한다고 말한다.(271 페이지) 상경 해석이 변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점이다. 성경이 원래 의미하는 메시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이는 신앙의 성숙을 의미한다.(272 페이지)
저자는 구원의 길은 성경에서 찾고 창조의 역사는 자연을 통해 배우라고 조언한다.(281 페이지) 진화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287 페이지) 가령 별이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진화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증언하는 동시에 자연법칙을 사용해서 섭리하고 창조할 능력이 있다고도 중언한다.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려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293 페이지) 하나님이 천사를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지질학적 방법을 사용해 바위를 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간절히 창조과학 신봉자들이 좋은 스승이나 균형 잡힌 책을 통해 창조주를 믿으면서도 과학을 수용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는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근원적 한계를 갖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무한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300 페이지)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진화라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성경에 표현된 문자에 얽매어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301 페이지)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발성이라는 개념과 우리 일상 용어인 우발성이란 개념은 전혀 다르다. 과학에서 설명하는 우발성이란 다양한 실현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됨을 말한다. 과학은 그 현상 뒤에 어떤 목적이나 섭리가 있었는지 또는 없었는지 다루지 않는다. 진화는 과학적으로 우연한 현상으로 설명되지만 전능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진화를 통해 생물들을 창조할 수 있다.(302 페이지)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설명을 진화론이라며 일방적으로 누명을 씌운다.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듯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과학도 겸손해야 하고 신학도 겸손해야 한다. 교회는 젊은 지구론이 무너지면 복음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미세 조정된 우주(fine tuned universe)란 개념이 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100억년 이상의 우주 역사가 필요하고 1000억개나 되는 은하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이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물리적 조건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세밀하게 조절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이를 인류 원리라 한다. 여섯 가지 우주 상수 값들이 초기 우주에서 0.00000001%만 컸다면 수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0.00000001%만 작았다면 탄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인간 없는 황량한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수소가 없다면 물도 만들어질 수 없다. 탄소가 없어도 생명은 생길 수 없다. 탄소 기반 생명체 외에 다른 생명체는 없다.) 다중우주론은 이런 미세한 조정을 우연으로 돌리는 것이다.(우주가 하나만이라면 그런 대단히 놀라운 조건을 갖추는 것이 이상하지만 우주가 아주 많다면 그렇게 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에서 인류가 존재할 조건을 갖추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직 모른다는 설명도 있다. 초월적 존재의 섭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은하 숫자들이 적었다면 우주 팽창이 더 빨라져 인류가 살 수 없는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넓은 공간에 우리 밖에 없다면 엄청난 낭비라고 말하며 외계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상정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지만 같은 현상을 통해 인류원리를 제시하는 것을 접하고 보니 신선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는 점이다. 나는 다중우주론을 (의미도 모르고) 좋아했지만 초월적 존재의 섭리라는 설명을 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 같은 책에 관심이 간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평범성의 원리라고도 하는 이 원리는 지구는 특별하지 않다는 원리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25,000 광년 떨어진 변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 은하 역시 1000억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 중 하나라는 사실도 그렇다. 이 원리는 생물학에까지 적용되었다. 인간은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영장류와 98% 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특별성을 찾아야 할까? 변두리 중의 변두리에서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방법으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예시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 중 특별한 것이 이성이다. 기독교에 아니 창조 섭리와 구원에 관심이 있지만 아직 제도권 기독교인이 아닌 나는 저자의 결론과 다른 길을 제시하고 싶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기억의 연관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를 통해 놀라운 우주의 비밀을 엿본 느낌이 든다. 지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