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哲學)이란 용어를 만든 니시 아마네(にし あまね; 1829 - 1897)를 한자로 쓰면 서 주(西 周)가 된다. 이로부터 주(周)나라 생각을 하게 된다. 주나라는 서주(西周)와, 서주 이후의 춘추전국시대 즉 동주(東周) 시대로 구분된다. 공자가 이상시한 시대가 서주시대고 동주시대는 무도(無道)와 패권 다툼의 혼란기였다.

 

각설(却說)하고 니시 아마네는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를 물리(物理)와 심리(心理)로 나눈 사람이다. 리(理) 개념의 추상화는 나의 오래된 관심사이거니와 지금 내가 리(理)를 논하는 것은 물리(物理)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 차원의 다짐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지질(地質)에 약한 것은 물리적 맥락 또는 이치에 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란 책의 한 챕터인 ‘심리학자이자 물리철학자’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본다는 것은 문화적 행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121 페이지)

 

핵심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한다는 점,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논할 수 있디. 하나는 “우리에게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할 것”이란 말(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폴 리쾨르의 데카르트 비판이다.

 

리쾨르는 데카르트가 했다는 직접적 자기인식은 자신을 느낀 것이지 인식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느낌도 앎의 일종이지만 적어도 ‘나’(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에 나오는 나)는 직관적 앎의 대상이 아니다.”(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95 페이지)

 

이렇게 나란 존재도 직관적 앎이 아닌 명백한 인식의 대상이거늘 물리나 지질 등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리쾨르의 말을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36 페이지)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의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이란 공언(孔言; 공자의 말)도 생각해볼 만하다. 위태로운 것보다 얻는 것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색을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체가 없고 간상체만 남아 있어 색을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심한 색맹, 어셔증후군(농아로 태어나 어른이 되면 점차 시력을 잃는), 윌리엄 증후군(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감각한 것을 양적인 체계 속으로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폐증(듣고 보고 느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상적 능력을 상실한 채 태어나는) 등의 네 가지 신경장애를 가진 사람들 즉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겸손이라는 말을 했다.(‘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242 페이지)

 

겸손은 공부에도 적용된다. 앞서 인용한 철학자 김영민은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우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라는 말을 했다.(같은 책 40 페이지) 겸손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겸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게 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들 수 있는 것이 김화영(최근 김리아로 개명) 교수의 말이다. ”혼돈은 때로 생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영혼은 반드시 혼돈의 용암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건전한 영성은 두 성역, 즉 혼란과 질서를 동시에 존중한다...혼란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질서는 우리를 통합시킨다.“(‘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172 페이지)

 

김영민 교수의 말대로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정(補正; 모자람을 보태고 잘못을 바로잡음)의 노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는 ’데카르트가 인간이 모든 것을 의심해도 사유(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유 주체인 인간이 자신을 자동적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설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해설사가 해설 내용을 느낌이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그리고 해설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허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보다 나부터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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