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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깊이 - 공간탐구자와 함께 걷는 세계 건축 기행
정태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정태종의 ‘도시의 깊이’는 헤테로토피아, 현상학, 구조주의, 바이오미미크리, 스케일 등의 개념으로 도시와 건축을 분석한 책이다. 치과 의사 출신의 건축학부 조교수(助敎授)로 자신을 건축으로 세상을 읽는 공간탐구자로 소개하고 있다. '도시의 깊이'는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을 연상하게 하는 책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저자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되는 행위의 공공 공간,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SNS 공간, 이질적이고 다양한 OO방(房)들이 즐비한 도시 풍경, 청계천으로 대표되는 인공 자연 같은 한국적 특이 공간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일상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로 무덤만 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architecture(건축)이란 말을 분석한다. 그것은 처음 또는 근원을 의미하는 arche와 장인(匠人)을 의미하는 tectron의 결합어이다. 그러니 건축이란 근원을 아는 장인의 기술이란 의미가 된다.(‘건축을 위한 철학’ 11 페이지) 미트로비치에 의하면 건축 과정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연결시킴으로써 장소를 만들어낸다.(‘건축을 위한 철학’ 158 페이지)
정태종 저자의 책은 공간과 장소들이 인상적인 건축 도시들을 찾아나선 여행의 산물이다. 중간 중간에 주요 건축 양식들에 대한 지식이 소개된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취향은 덤이다. 가령 ”개인적으로 가에다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나 ’청교도‘ 등 벨칸토 오페라를 좋아해서 기회가 되는대로 공연을 보러간다.“(55 페이지)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문화 공간을 즐거운 헤테로토피아로 소개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201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장이 담양 소쇄원에서 영감을 얻어 대나무와 자작 합판, 스틸 등으로 제작한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 1941 - )의 공간 조형물인 ’신명(晨明)‘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된다.(신명이란 새벽녘을 의미한다.)
저자의 책은 전방위적이다. 가령 바르샤바편에서는 사람들이 옛 소련이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문화과학궁전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듯 하다고 말하다가 그 건물 앞 건널목이 피아노 건반 모양임을 덧붙이며 바르샤바에서 쇼팽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만 사람들을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마음을 구석구석 위로해준다고 말한다.(74, 75 페이지)
본문에 의하면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한 사람은 크리스티안 노베르크 슐츠로 공간의 개념을 인간의 실존 즉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무는 거주 감각으로 정의했다. 알베르트 페레즈 고메즈는 감각적 속성과 신체감 등을 사고하며 대상과의 상황을 실험하고 구축해 신체로 체험하는 것을 현상학적 건축이라 주장했다.(80 페이지)
현상학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다. 그것은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 정보를 이용한다. 조금은 추상적인 진단일 수 있지만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색이 다양해서인지 건축은 색에 대해서는 주인공으로 나서기보다 배경이 되어 사람을 품으려고 한다는 말도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건축은 미술과 달리 색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82 페이지) 우리는 시각으로 대부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물론 가장 민감한 감각은 후각이다. 저자가 말하는 도시란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면 작동 시스템이 달라지는 장소다. 그런데 ”커피는 오감 그 자체.“(91 페이지)란 말은 무슨 뜻일까?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건축 이야기만 하면 재미가 덜할 것이다. 그래서 해당 도시의 유명 아이템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자는 스콜과 태풍과 오토바이 소리와 매연 등 다양한 현상학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 호찌민 시를 어떤 감각보다 초콜릿 커피 향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회랑은 어느 시대에나 사랑받는 건축 어휘였다. 조선 시대 왕궁도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저자는 건축은 패션이라 말한다.(95 페이지) ”빛의 교회, 물의 절, 명화의 성당 등 일본 현상학적 건축설계를 대표하는 안도 다다오”(98 페이지)란 말을 통해서도 현상학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스위스의 피터 줌터가 설계한 쾰른의 콜룸바 박물관은 오래된 폐허 위에 설계되었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서울 도심부인 종로를 재개발하면서 발굴된 유적의 경우 대부분 박물관으로 옮기고 흔적만 남기거나 유리를 이용하여 시각적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 반면 콜룸바 박물관은 폐허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자연과 교류하게 하면서 역사의 지층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102 페이지)
저자는 전기와 건축을 인류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한다. 낮의 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밤의 빛으로 살아난다.(103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에딘버러의 밤은 새로운 활동으로 활발해지는 곳이다. 이를 읽으며 여름 밤 정동(貞洞)이나 혜화(惠化) 답사 시간을 떠올린다.
빛은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다는 최고의 매체다. 제주의 바다에서는 빛보다 물이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 불, 공기, 대지를 떠올린다. 뒤집힌 자연의 반전을 경험하고 하늘을 내려다보는 신(神)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키타에 있는 미술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읽으며 나는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는 카뮈의 문장을 생각한다.
저자는 벚꽃이 피는 봄에 오면 모네의 그림인 ’왼쪽을 바라보는 파라솔을 든 여인’처럼 흩날리는 벚꽃과 바람 사이에 담긴 멋진 박물관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112, 113 페이지) 상당히 시적인 문장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돔 이노(dom ? ino)라는 개념을 보자. 기존의 내력벽으로 하중을 해결하던 것을 기둥으로 대체하여 벽체를 자유롭게 하여 다양한 평면구성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저자는 ”나는 도시의 모나드이고 나의 활동은 매 순간 새로운 사건으로 도시에 새겨진다. 매 순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모나드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개념이다. 저자는 서울 도심부를 서울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 장소로 그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자연스럽게 섞인 곳으로 정의한다.(134 페이지)
저자는 현대 건축의 중심으로 구조주의를 든다. 저자에 의하면 한강은 강남과 강북의 명확한 경계가 된다.(153 페이지) 한강진역과 이태원역 사이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뮤직 라이브러리를 볼 수 있다. 저자는 보이드(void) 공간을 언급하며 소통을 설명한다. 이태원과 한강을 나누어 한쪽만 사용하던 기존 공간에 도넛처럼 구멍을 뚫어서 양쪽 공간이 하나로 엮이는 새로운 위상학적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154 페이지)
저자는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강추한다. 압도적인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저자는 건축 어법 또는 어휘라는 말을 사용한다. 건축에서도 예측 가능한 어휘는 실망감을 준다. 프로젝트마다 새로울 수는 없지만 동선에 따른 설계는 지속적으로 새 공간과 의외성을 만들어야 한다.(161 페이지)
저자는 자연을 개발하기보다 적절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필요하면서도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건축의 필요성을 논한다.(163 페이지) 컴퓨터를 이용한 변수조정으로 다양한 형태를 디자인하는 파라메트릭(parametric) 디자인이 대세인 듯 하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건축은 형태보다 관계에 중점을 둔다.
"건축에는 관계를 통한 구조주의적 디자인과 시각적인 현상학적 디자인이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168 페이지)라 말하는 저자는 학교, 감옥, 병원같이 공간의 자율적 관리가 필요한 프로그램에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이 활용됨을 언급한다. 이 기법은 시각적 권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시적 권력에까지 활용되고 있다.
저자의 책을 통해 프랭크 게리가 파라메트릭 건축물을 설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칸 센터 파리란 건축물이다.(게리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다.) 바이오미미크리는 재닌 베뉴스가 처음 도입했다. 그는 자연에 대해 배우기보다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건축가다. 새 날개처럼 보이는 밀워키 미술관, 새 둥지처럼 철골이 서로 엮여 공간과 구조를 만드는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 등이 관심을 부른다.
저자의 책을 통해 단위 유닛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리좀(rhizome)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카쇼 쿠로카와가 유리 루버를 이용해 만든 국립신미술관이 투명하다 못해 푸른 청자를 만들어낸 듯 하다고 설명하며 그가 청자를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저자 자신의 눈에 청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올림픽공원의 엄지손가락 형태의 조각품을 보고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렇게 세련되고 현대적인 공간에 누구나 들어오도록 하는(무임승차하게 하는) 의미로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저자는 한 가지를 위해 명확하게 재단해 종이 오리기가 근대건축에 비유된다면 가위 없이 종이를 접어 형태를 만드는 것(오리가미;おりがみ)은 현대건축에 비유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루버를 일본 특유의 엿보기(노조꾸; のぞく) 문화와 연결짓기도 한다. 루버(louver)는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광선은 투과시키기 위해 설치하는 판자를 말한다.
저자는 지난 역사의 장식을 배제하는 것만이 현대 건축의 길이 아니라 말한다.(217 페이지) 현대 건축가들은 장식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장식과 동시에 구조와 공간이 되는 디자인을 만들어낸다.(218 페이지) 알함브라는 붉은 사암으로 인해 붙은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아랍어다. 아랍에 의해 침략받은 스페인의 무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이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예로 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설명한다. 저자는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도시는 그날의 자신을 보여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스케일편(다섯 번째 챕터)에서 베네치아를 미로 같은 리좀 도시로 정의한다.
개발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비용 문제로 개발이 늦어지는 탓에 오히려 전통이 남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일수록 현대 건축물이 많은 것도 그렇다. 저자는 군나르 아스풀룬드가 설계한 스톡홀름 공공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로에서 입구로 연결되는 길의 낮은 계단과 벽에 건축가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도서관이다. 건물 어디에도, 심지어 공공 건물 홈페이지에도 건축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이 없고 개관식에 건축가를 초대하기는커녕 언급조차 안 하는 나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한다.(269, 270 페이지)
저자는 사람들이 바이칼 호수를 기억하지 그 호수가 자리한 이르쿠츠크라는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제 인류는 자연 속의 도시, 도시 속의 자연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라 말한다.(285 페이지)
책을 다 읽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건축 전공자의 책이지만 건축 이야기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건축 이야기도 결국 삶 이야기이리라. 현상학이란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제시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건축 구조 역학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