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 봬도 탐조 회원이다. 하지만 완전 초보인 나는 새에 대해 나름 잘 알면서도 겸손한 매너로 "저도 완전 초보예요."라 말하는 분 때문에 와~ 안전 초보예요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탐조 회원이 아닐 때는 서슴없이 탐조(探鳥)니 ornithology(조류학)이니 하는 말들을 했다. 하지만 새 세계에 탑승한 이래 지식도 없으면서 탐조나 조류 같은 말을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 교보문고에 가서 "조류 책 코너는 어딘가요?"라고 할 수 없어 다르게 말했다. 문제는 "새 관련 책은 어디에 있어요?"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대뜸 "새는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었다는 점이다. 책을 파는 곳이기에 당연히 새에 관한 책일 수밖에 없는데 직원은 "조류 책 코너요? 알파벳 I 코너로 가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새는 어디에 있나요?"라는 내 선문(禪問) 같은 말에 직원은 극히 모범적인 답을 한 것이다.

 

'서울해법'의 저자인 건축학부 정성홍 교수는 자신의 책은 개별 건축물의 특이성이나 건축가가 구사하는 어휘보다 도시건축의 공통문법에 집중한 책이라 설명했다. 이 말을 위해 저자가 선택한 말은 개체성을 드러내는 빠롤보다 집합적 의미인 랑그라는 말이었다.(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당분간 나는 새에 관한 책 가운데 빠롤이 아닌 랑그에 더 비중을 둔 책을 읽을 것이다. 가령 가와카미 가즈토의 '조류학자라고 다 새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나 '조류학자 무모하게도 공룡을 말하다' 같은 책을 읽으려 한다.

 

이 분의 말인지 모르나 새는 공룡의 후예가 아니라 대멸종을 이겨낸 공룡인 새(공룡 즉 새)라는 말이 머리를 맴돈다. 그래도 개별 새들도 개별 공룡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2020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작인 조혜은의 '새'에 의하면 지구에 사는 새의 종류는 8600종, 우리나라에 사는 새의 종류는 700종이다. 내가 아는 새는 몇 종이나 될까?란 생각을 하면 막막하다.

 

이상(李箱) 시인이 제비라는 이름의 다방을 연 것은 일제 강점기에 친구 구본웅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義士)의 최후를 보고 날렵하고 신출귀몰하기에 붙은 그 분의 별명인 제비란 이름을 권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이상 시인의 제비 명명(命名)이 비상(飛翔) 충동과 무관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런 단정은 새를 무조건 비상 충동과 관련짓는 것 만큼 설득력이 없다.

 

새로부터 비상(飛翔)이 아닌 새로운 키워드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해답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읽는 수밖에 없다. 영문학자 도정일 교수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을 소환해 본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서정을 그들(시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띄워보내지 않았던가."('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350 페이지)

 

최근 나온 동 저자의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에 위의 이야기와 공명할 '생태문학의 딜레마' 란 챕터가 있다. 기대된다. 다시 책 이야기로 귀환했다. 그저 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새와도 친해지기 위해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서정을 펼칠 수 없는 시대라지만 그럴 여지는 있으리라. 주된 문제는 내 감성이 무디다는 것이다. 어제 분명 효연재(曉然齋)에서 본 직박구리에 아, 하고 감탄했지만 감성은 살아 있으나 상투적이어서 문제다. 새롭게 보는 눈을 가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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