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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 - 웅진도독부에서 주한미군까지
이재범 외 지음 / 중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한반도에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는 길다. 삼국시기부터였으니.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김창석, 이재범 등 12명의 저자가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목차를 보니 기억이 하나 둘 살아난다. 몽골군(책에는 몽고군이라 표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명나라군, 모문룡(毛文龍)군, 정묘/ 병자호란의 청군 등을 거쳐 해방 이후 북한의 소련군과 주한미군까지 참으로 긴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내 관심은 ‘개항기 청군’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챕터의 부제는 ‘민씨 척족의 사리사욕이 불러들인 12년 재앙’이다.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서술할 사건 또는 이야기 때문이다. 발간의 변을 듣기 전에 이야기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피침(被侵)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는가?란 물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중심의 서술이어서 아쉽지만 계승범 교수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각설하고 발간의 말(‘외국군 주둔사를 펴내며‘)에서 편집부는 1906년 일제가 미 8군 기지에 군사 시설을 들이민 이래 용산기지는 1백년 가까이 우리 땅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근세 들어 이 땅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쫓겨난 민비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청국 군대를 끌어들이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외국군 주둔의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군 주둔이 정치나 군사문제뿐 아니라 우리 문화와 풍속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 외국 주둔군과 이 나라 지배집단 사이의 유착관계를 밝힌 책이다. 또한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외국군 가운데 상당수는 극소수 지배집단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걸해서 불러들인 반민족적 사리사욕의 결과였음을 밝힌 책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사관 앞에서 해설을 하게 된 나는 중국대사관과 청나라 군대의 연관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밝혀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사와 무관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다행히 이런 기사가 있다.
“중국 대사관 자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수립하면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1882년 이후 중국이 사용해왔다.”(2017년 6월 17일 중앙일보 기사 ‘명동 주둔 청나라 군대의 첫 임무는 대원군 유괴와 납치’)
‘발간의 말’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884년 7월 청국이 베트남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던 병력 4천 명 가운데 2천 명을 철수시키려고 하자 당시 민씨 척족정권의 우두머리이던 민영준은 청국 군문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철군 보류를 애걸했다. 청국 군대가 바로 부패하고 무능한 척족정권을 유지시켜주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이기에 (많은 부분을 실을 수 없는) ‘발간의 말’에 상세하게 실었을 것이다. 다음 부분을 보자.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이래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1882년 이전 외국군 주둔의 사례는 있었지만 외국군이 장기간에 걸친 주둔한 것은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계기가 되었으리라.
외국군 주둔은 우리 국력이 약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외세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8 페이지) 현재 용산 미군 기지의 반환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2020년 12월 11일 한겨레 신문 기사 ‘주한미군기지 12곳 돌려받는다…‘용산기지 반환’ 본격 개시‘)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발간된 지 20년 된 책이다. 최근의 역사가 반영된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다시 각설하고 우리 역사상 이민족의 침입이 가장 극심했던 왕조는 고려였다.(37 페이지) 고려는 몽골에 무릎 꿇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무신정권기이다. 당시 정권은 무신정권임에도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무신정권 집정자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기보다 사병 집단인 도방을 강화하는 데 주력한 탓이다.(38 페이지)
이는 앞에서 서술한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민씨척족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다. 당시 명군은 우리가 불러들인 군대다. ”침략군으로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도 말할 것도 없지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군 또한 변방의 소국을 위해 피흘려 싸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106 페이지)
명군은 치밀한 계산에 근거해 참전했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러했지만 임란이 진행되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 조정은 조선이 일본과 공모. 합세해 자국을 침입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107 페이지) 조선 정부는 명에게 조선이 일본의 향도(向導; 길잡이)가 아님을 증명했다. 명의 참전은 그 연후에 결행되었다.
얼마 전 조종산(祖宗山)이란 개념을 알았다. 물도 근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지점이 있으니 이를 일러 조종산(祖宗山)이라 한다. 이름과 개념 자체가 조금 다르지만 경기도 가평에 조종암(朝宗巖)이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선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뜻으로 쓴 글자로 오랑캐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의미다.
이뿐인가. 충북 괴산에는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세운 신종(神宗; 임진전쟁 당시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황제)과 의종(毅宗;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사당인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각설하고 왕실이 아닌 민간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당이란 점이 특이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숙종은 명나라 신종을 제향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개항기 청군(淸軍)을 보자.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배경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민비와 고종의 의지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하기 시작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지배하려는 청나라의 무력 기반이었다.
이 군대는 1884년에는 갑신정변마저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진압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우리 내부의 근대적 변혁을 저지하기도 했다.(174 페이지) 임오군란을 피해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가 고종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청국에 청병(請兵)하자고 제안하자 고종이 따랐다.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이 요청했기 때문이지만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마건충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대원군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들은 오직 일본인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뜻은 없다는 거짓말로 대원군을 안심시켰다. 물론 청은 임오군란을 사주한 인물로 대원군을 지목하고 그를 납치할 준비를 세워놓았다.(대원군이 청 군영을 방문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만류한 사람은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정현덕뿐이었다.)
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병력은 군란 때 파병된 3천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정부는 군란 이후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서 1년이란 한정된 기간이었지만 병력주둔권을 인정했다.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함께 주둔한 것이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싸웠고 조선측에서도 이들의 무력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개화파도 그런 세력의 하나였다. 1882년 8월 23일 청이 조선에 근대적 식민지배를 강요할 수 있는 규정(속방조항)을 명문화시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이때 개화파는 청나라와 일본 중 어느 나라를 기축으로 삼아 대외정책을 펼지를 놓고 나뉘었다. 김윤식 등 청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 사람들이 시무(時務; 온건) 개화파였고 김옥균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개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하다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제휴할 수 있는 대외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변법(變法; 급진) 개화파였다.
이 때문에 1884년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반청 운동의 성격도 갖는다. 1884년 1월 한 약국에 인삼을 사러 들어간 청병이 외상값을 지불하라고 독촉하는 주인을 총으로 쏴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한성순보에 중국 병범죄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러자 청 병영에서 한성순보를 발간하던 박문국에 항의하고 청 정부도 조선 정부에 엄중한 항의서를 보냈다.
당시 기사를 취재하고 원고 작성 등의 실무를 맡았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책임을 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4년 5월 청 상인이 관련된 이범진(李範晉) 사건이 일어났다. 부동산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전 병조판서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인 이범진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아버지다. 당시 조선 주제 청 상무공서가 사건에 개입해 공서에 천자법정이라 써 붙였다. 이를 본 조선 정부는 물론 영국 대리 총영사 애스턴도 항의했다. 조선에서 발생한 사적인 사건을 청 천자의 법정에서 재판한다는 뜻이므로 조선인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김윤식의 회고에 의하면 홍영식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서양의 제도를 흠모하고 청을 오랑캐 보듯 하며 공자와 맹자의 도(道)도 배척했으며 김옥균 등은 일본을 사사건건 흠모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주(自主)였다고 하며 청과 잘 지내는 김윤식을 가장 미워했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4월 초대 조선 주재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내한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최초의 서양 사절단이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보빙사 일행은 7월 인천항을 떠나 일본에 들렀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인 청년 퍼시벌 로웰(1855∼1916)을 고용해 보빙사에 합류시켰다.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11월 일본에 돌아온 뒤 12월 조선에 왔다. 홍영식이 로웰이 방미 외교와 산업 시찰 등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다는 별도의 보고를 고종에게 올리자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초청한 것이었다.
로웰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사건의 배경과 주도자들을 소개한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를 기고했다.
그와 가까웠던 홍영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배신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주모자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과 미국으로 도피했으나 홍영식은 혼자 남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그는 대의를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여기고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고 썼다.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한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썼다.
갑신정변은 뒷받침할 무력 부재로 실패한 전형적인 케이스다.
주한 미군을 보자. 그들은 우리나라의 외국군 주둔사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들을 세웠다. 1) 최장기간(1945년 9월 이후 지금까지), 2) 주둔 규모(상시적으로 4에서 5만 병력 주둔). 3) 전 국토의 미국군 기지화. 4) 우리 동족을 겨냥.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은 안보의 담보가 아니라 안보의 교란요인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의 세력 균형자가 아니라 전쟁을 촉발시키는 평화의 파괴자로 기능했다.(37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