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슬프게 들린다. 봄인가 보다. 이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듣고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을 듣는다. 빠른 악장보다 느린 악장이 더 좋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은 듣지 않는다. 슬픔 모드로의 침잠을 경계하는 차원이다. 어떤 경우든 침잠(沈潛)은 부정적이다.
누군가는 봄이 슬픔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염명순 시인은 “봄날엔 모두 하늘로 오른다”고 말했다.(시 ’봄날엔‘) 가볍기 때문이다. 다른 계절은 가볍지 않아 가라앉는데 봄은 날아오르니 사라지는 것이고 그래서 써버리는 것, 흘러가는 것과 관계된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경책(警策)이 생각난다.
이진경 교수의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에 나오는 글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에 머문다면 우리는 보편 법칙을 얻을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기에 어디에나 적용된다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이것‘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새겨야 할 말이다. 봄 이야기 하지 말고 열심히 봄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