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구) 문지 스펙트럼 9
박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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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첫 단어는 “어머니는..“이다. ”어머니는 다시 바느질을 하며, 대체, 그 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여본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다...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라니..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이하 소설의 어머니) 늙고 쇠약하다. ”아들은 잘 때면 반드시 불을 끈다. 그러나, 혹은, 어느 틈엔가 아들은 돌아와 자리에 누워 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아들에게는 그런 버릇이 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한 것인 줄 알았다. 박태원 작가와 나는 마지막 글자 하나만 다를 뿐이다..ㅜ ㅜ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광교(廣橋)로 향하는 구보는 한낮의 거리 위에서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쇠약임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화신상회 앞으로 가 안으로 들어간다. 구보는 인파 속에서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 한다. 구보는 거리에서 한 여자를 보고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구보는 약초정(若草町; 충무로.. 약초는 어린 풀을 의미한다.)을 지나간다.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구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경쇠약, 그러나 물론, 쇠약한 것은 그의 신경뿐이 아니다. 이 머리를 가져, 이 몸을 가져, 대체 얼마만한 일을 나는 하겠단 말인가.”

 

소설에 안잠자기란 말이 나온다.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며 일을 도와주는 여자를 말한다. 드난이란 말도 나온다.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 지내며 그 집의 일을 도와줌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서해(曙海)란 말도 나온다. 새벽 서, 바다 해자다. 소설가 최학송(崔鶴松)의 호다.

 

구보는 자기 지식의 고갈을 느끼며 악연(愕然)한다. 몹시 놀란다는 의미다. 소설에는 경성역도 나온다. 동경역이 아니라 스위스 루체른역을 모방해 지은 역이다.(1925년) 경성역에는 황금광시대란 말이 나온다. 황금에 미친 시대를 말한다.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은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하여 갔다. 황금광시대. 그들 중에는 평론가와 시인, 이러한 문인들조차 끼어 있었다.”

 

구보는 일찍이 창작을 위하여 그의 벗의 광산에 가보고 싶다 생각하였다. 사람들의 사행심, 황금의 매력, 그러한 것들을 구보는 보고, 느끼고, 하고 싶었다. 소설에는 칼피스란 음료가 나온다. 구보는 외설(猥褻)한 색채를 갖기에 싫어한다. 맛도 그의 미각에 맞지 않는다.

 

칼피스(カルピス)는 1919년 미시마 카이운(三島海雲)이라는 사업가가 만든 일본 최초의 유산균 음료다. 카이운은 중국에서 교사생활과 잡화상 사업을 벌이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으로부터 군마(軍馬)조달 의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군마는 오쿠라와 미쯔이 재벌이 독점한 상태라 카이운은 미개척 지역인 몽골로 눈을 돌린다.

 

군마를 구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몽골로 향한 카이운은 몽골 유목민의 산유(酸乳)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칼피스를 만들기에 이른다. 당시 회사는 칼피스 맛을 달콤하고 시큼한 첫사랑의 맛으로 광고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승려의 아들이자 불자(佛者)였던 미시마 카이운은 칼피스를 보시(布施)의 음료로 생각하고 폐허로 변한 도쿄에서 식수를 찾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다.

 

소설에는 조달수(曹達水)란 말도 나온다. 소다수를 이르는 말로 박태원 작가에 의하면 칼피스는 타락한 연애 시대를 상징하고 조달수는 여학생 취향을 상징한다. 칼피스와 조달수론은 구보 즉 박태원의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사와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지향성을 나타낸다.

 

소설에는 임금(林檎)이란 말이 나온다. 능금을 말한다. 소설에는 다료(茶寮)란 말과 끽다점(喫茶店)이란 말, 다방이란 말이 나온다. 모두 찻집을 말한다. 광화문통 이야기가 나온다. 울가망이란 말이 나온다.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기분이 나지 않음.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삐꾸는 고약, 까시는 놀림이다.

 

구보는 자신을 구포로 발음하는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원고료라 말하는 것을 듣고 원호료라 말하지 않은 것에 경의를 느낀다. 웃음이 슬며시 새나온다. 조선호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호텔’이란 소제목으로 언급되었다. 그 앞의 경운궁 이야기는 없다.

 

소설에서 구보가 걸은 곳은 이리저리 어지럽다. 돌아오고 다시 가고...사실 간 곳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순서를 따라 읽어야 이야기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보는 다시 어머니 걱정을 한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아들을 생각하며 근심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보는 친구가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 말하는 것을 듣는다. 구보는 이에 정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한다. 마지막 부분에 회신상회가 다시 나온다. 화신백화점의 전신이다. 1931년 설립된 곳이다.(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것은 1934년이다.) 화신상회가 1931년 박흥식(朴興植)에 의해 매수되어 백화점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가장 마지막 문장은 구보가 이제 어머니가 혼인 이야기를 꺼내도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어쩌면 상당히 중요한 결론인 수도 있다. 소설에서 특별한 사건은 없고 전편은 구보의 걸음, 상념 등으로 일관하는데 여자 이야기도 한 몫 한다. 그 우회 끝에 구보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 보면 허망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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