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보낸 하루 라임 틴틴 스쿨 3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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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보낸 하루’에 이어 읽게 된 책이다.(출간 연도는 ‘경성에서 ~’가 먼저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양에 가서 하루를 보낸다면?‘이란 가정 아래 걸은 한양 산책기다. 조종산(祖宗山)이란 용어가 나온다. 물에도 근원(발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점이 있는데 그런 산을 조종산이라 한다. 한반도의 조종산은 백두산이다.

 

한양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도시다. 한양 도성 안에는 원칙적으로 경작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날마다 필요한 먹을거리, 생활용품 등을 도성 밖에서 들여왔다.

 

북과 징으로 시간을 알리는 것을 보자. 5경 3점을 예로 들자. 5경은 새벽 3시 - 5시다. 북을 다섯 번 치고 징을 세 번 친다.(이것을 다섯 번 되풀이한다.. 경; 更, 점; 點. 경의 아래 단위인 점은 1경을 5등분한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양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구의 처, 애미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역모에 가담한 집안 여성이 노비가 될 경우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핑계는 아닌 듯 하다는 말이다.

 

양반가는 노비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갈 수 없었다. 노비는 양반가의 재산 목록 1호였다. 노비는 사고팔 수 있었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다른 이에게 기증하거나 선물할 수도 있었다. 부모 중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된다. 이를 종모법이라 한다.

 

노비 부부의 주인이 다르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어미를 따른다. 어미쪽 주인에게 아이 소유권이 있다. 노비 주인은 자기 집 남종이 다른 집 여중과 혼인하는 것을 꺼린다. 남의 재산을 불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노비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4 페이지) 원래 노비(奴婢)의 노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난 대로인 육조(六曹) 거리는 조선의 행정 타운이다. 좌우에 의정부, 한성부, 이호예병형공의 육조와 같은 관아(官衙)가 배치되었다. 큰길 후방으로는 하급 관청이나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내수사(內需司),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제용감(濟用監), 사복시(司僕寺; 병조 소속으로 말과 목장에 관한 일을 맡던 관아) 같은 관아가 군데군데 있다.

 

조선의 탈것을 보자. 초헌(軒)은 판서가 타는 외바퀴 수레다. 평교자(平轎子)는 정승이 타는 수레다. 한성부가 전국의 호적 업무(호패 발급 등)를 맡았다. 그래서 한성부에 호적청(戶籍廳)이 있었다. 마의청은 동물병원이다.

 

반수(泮水)는 성균관의 동서에서 흘러내린 물이 남쪽에서 합쳐진 물을 말한다. 중국 주나라 때 대학 주변에 물을 흐르게 한 전통을 따른 것인데 조선은 제후국이어서 반만 흐르게 한 것이다.(오늘날에는 아스팔트로 복개되었다.) 매단다는 의미의 현(懸)자를 쓰는 현방(懸房)은 푸줏간을 말한다.

 

한양에서는 반수 건너편 사람들을 반촌 사람들이라 했다. 신분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다.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라는 학자가 자신의 사노비 백여 명을 성균관에 바쳤다. 이 사노비가 반촌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입학하면 반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양 여겨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반촌 사람들은 성균관과 관련된 온갖 잡일을 하며 산다. 그들은 공자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와 유생들의 식사로 제공되는 고기를 공급하다 보니 몇몇 반촌 사람들이 소를 도살하고 고기를 판매한 것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성균관의 기숙사다. 노론 집안 유생들은 서재에, 소론과 남인, 소북 계열의 유생들은 동재에 거했다.

 

한양 사람들이 과거에 크게 유리했다. 3년마다 치르는 정규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의 경우 합격자의 30에서 40퍼센트가 한양 사람들이다. 별시는 한양 유생이 절대 유리했다. 한양 사람이 아니고서 별시 정보를 제때 알기 어려웠고 알았다 해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별시가 식년시보다 선발 인원이 많았다.)

 

별시 가운데 임금이 봄, 가을에 문묘에 참배하고 난 뒤 치르는 알성시도 있다. 1776년 규장각을 세운 뒤 정조가 규장각 각신의 사무실로 만든 것이 이문원(文院)이다. 이문원 바깥 기둥에 현판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비록 대관과 문형(文衡; 대제학)일지라도 전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오르지 말라.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문신 가운데 4품 이상은 ~ 대부, 5품 이하는 ~랑이라 한다. 정3품 이상은 당상관, 그 이하는 당하관이다. 당상은 대청 위를 말한다. 흥인문 안팎으로 연못이 두 개 있다. 동지(東池)다. 흥인문 안쪽의 연지가 있던 동네가 지금의 연지동이다.

 

종루가 있는 시전(市廛) 거리를 운종가라 한다. 난전(亂廛)은 길거리 가게다. 좌의정 채제공이 건의해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 것을 신해통공이라 한다. 피맛길을 따라 기와집의 담장이 늘어선 주택가를 걷다 보면 이문이 나온다. 도둑을 막기 위해 동네마다 설치한 문이다.

 

18세기 중후반부터 혜민서와 활인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개인 의원과 약국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질 좋은 약재 중에서 궁중에 진상하고 남은 것이 민간으로 흘러나와 팔리기도 했다. 종묘의 오른쪽 동네와 그 아래로 종로 4가에 걸쳐 있는 시장인 배오개(이현) 시장에는 채소가, 숭례문 밖 칠패 시장에는 생선이 팔렸다.

 

배오개 시장에서 파는 채소, 과일, 약초는 한양도성 안팎에서 재배한 것이다. 원래 한양도성 안에서는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찬거리 수요가 증가하자 도성 안팎에서 채소 농업이 활발해졌다. 채소, 과일, 약초 농사가 돈벌이가 되자 양반 사대부 중에서도 채소밭을 가꾸기도 했다. 배오개 시장은 1760년 무렵 영조가 배오개 근처의 민가 수를 늘리기 위해서 시전 설치를 허가해 생겨난 시장이다.

 

마포 나루 이야기를 보자. 나루는 나룻배들이 강을 건너는 양쪽 지점을 말한다. 나루터는 배가 닿고 떠나는 곳을 말한다. 마포 나루는 경강(京江)에서도 전국의 배들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조선의 3강은 용산강, 서강, 한강이다. 5강은 3강 플러스 마포, 망원이다. 8강은 5강 플러스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다.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고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다. 서쪽인 마포에서 오는 새우젓 장수는 아침에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도성 안으로 들어오니 얼굴이 타고, 동쪽인 왕십리에서 오는 미나리 장수는 아침 햇빛을 등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니 목덜미가 탄다는 의미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남촌의 술, 북촌의 떡을 알아준다는 말이다. 대전별감(大殿別監)은 왕의 잔심부름을 하는 하예(종)이다. 무예별감(武藝別監)은 왕의 호위 무사다. 대전별감은 조선 최고의 멋쟁이다. 항상 유니폼과 같은 관복을 입어야 하는 양반들처럼 지루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시사(詩社)는 한시를 짓는 모임이다. 원래 양반들이 하는 모임인데 인왕산 기슭에 경아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천수경이 유명하다. 송석원의 주인이었다. 서민, 양반, 중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잘 그린 것이 ’조선에서 보낸 하루‘의 특징이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독서하는 여인’이란 그림이 눈길을 끈다.(윤덕희는 공재 윤두서의 아들이다.) 인정(人定)은 종을 쳐 통금을 알리는 것이다.(28번) 파루(罷漏)는 쇠북을 쳐 통금해제를 알리는 것이다.(33번)

 

한성부가 다스리는 곳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였다. 성저십리란 한양도성 밖 십 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 전기 한양은 도성 안은 도시, 성저십리는 농촌으로 뚜렷이 구별되었다. 관례적으로 한양 주민은 도성 안쪽(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만을 가리켰다. 조선 후기에는 성저십리로 한양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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