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최예선은 여행은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하며 그 시대를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예술가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오후 세시, 그곳으로부터’는 공존(共存), 애도(哀悼), 사유(思惟) 등을 키워드로 여행지를 나눈 예술 답사기이다.

 

저자는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눈을 감은 1989년을 마지막으로 창덕궁은 집으로서의 온기를 잃었다고 말한다. 창덕궁에는 우리 나라 최초로 벽화가 그려진 공간이다. 벽화라고 하지만 비단 위에 그림을 그려 표구하고 적당한 위치에 부착한 그림으로 이를 부벽화(付壁畵)라 한다. 1917년 난 화재를 수습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1919년 고종 승하와 3.1 만세운동 등을 겪으며 공사가 지연되었고 1920년 말에 끝이 났다.(15 페이지)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창윤(蒼潤) 이용우(李用雨),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정재(靜齋) 오일영(吳一泳),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등이 화가로 참가했다.

 

공존의 두 번째 포스트는 소설가 구보가 걸었던 길로 그 가운데 하나인 미쓰코시 백화점(옛 동화백화점, 현재는 신세계백화점)과 경성부청(서울시청이었다가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곳)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백화점은 시인 이상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얼마전 창씨개명을 위해 경성부청에 줄을 선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저자는 신세계 백화점이 80주년이 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1933년에 개설한 미쓰코시 백화점을 자신의 원조로 생각하는 것일까?“(42 페이지) 책은 줄곧 저자의 분신인 구원씨의 현실이 나오고 그가 걸은 길이나 거리에서 이름을 떨친 과거의 인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공존의 세 번째 장소는 박경리 작가의 정릉집이다. 이 집은 박경리 작가가 원주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이 곳에서 대하소설 ‘토지’가 태어났다. ”선생이 살기 위해서 선택한 동네, 정릉. 그곳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오다가 멈추게 되는 막다른 골목 같은 동네였고, 날 것과도 같은 밤이 찾아오는 산동네였다.“(56 페이지)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을 주소로 하는 이 집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쟁중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박경리는 44세에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쓴 소설들은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

 

공존이란 키워드의 네 번째 장소는 원서동에 자리한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66 - 1965)의 집이다. 이 집에 아회도(雅會圖)가 있다.(‘아집도; 雅集圖’라고도 한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춘곡 고희동 등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아회란 글을 짓기 위(爲)한 모임, 아담한 모임 등을 뜻한다.

 

일기회(一器會)를 그린 그림이다. 일기회란 여럿이 각각 음식을 한 그릇씩 가지고 모여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일행은 각자의 집에 모일 때마다 모임 이름을 달리 정했다. 원복소집, 남원속집, 동원세모 식으로. 오세창 선생 집에 모인 모임은 한동아집이라 했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 유학을 떠나 서양화의 기법을 배워온 예술가다. 1950년대 말 춘곡은 삼대가 함께 살아온 원서동 집을 떠나 제기동의 양옥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존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장소는 창신동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 - 1965)의 집이다. “1910년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과 한국은행을 거쳐 1920년대 조선총독부, 경성역, 경성부청 등 대규모 공사 중에서 창신동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89 페이지)

 

창신동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낙산의 남쪽 줄기다. 창신동이 원래 토막집 천지는 아니었다. 동대문과 가까운 평지에 고풍스런 한옥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백남준이 태어나 자란 곳도 창신동 한옥이었다. 박수근이 창신동에 산 시기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의 주인공 화가였던 박수근은 “수많은 여인들을 캔버스에 그렸는데, 모두가 다 아내의 분신이었다. 빨래 하는 아내, 푸성귀를 파는 아내, 머릿수건을 쓰고 물을 긷는 아내, 노상을 걸어 다니는 아내, 아이에게 앞섶을 열어준 아내...”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박수근을 해외 전시회에 등장할 수 있게 해준 분들이 미국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리아 헨더슨, 첫 상설 화랑인 반도화랑을 세운 실리아 지머맨, 마가렛 밀러 부인 등이다. 박수근이 전쟁 후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피엑스에서 초상화 등을 그려주며 가장 역할을 한 이야기가 ‘나목(裸木)’에 나온다.

 

땅이 아닌 집만 소유한 박수근 가족은 땅 주인이 철거를 강요하자 집을 포기하고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했다. 창신동 집은 그렇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박수근의 집터‘를 알리는 얇은 표석 하나만이 남았다.(100 페이지) 박수근의 아호(雅號)인 미석은 고향의 바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흰색 아연으로 화폭을 겹쳐 칠하며 캔버스에 돌을 입힌다. 태초에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바위가 되기까지 얼마나 장대한 세월이 흘렀던가. 돌은 시간이었다.”(101 페이지)

 

애도의 첫 번째 장소는 윤동주의 시작(詩作) 공간이다.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 봄부터 1942년 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다. 연희전문학교는 소나무숲이 울창한 언덕에 지어졌다. 1917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에 작은 목조 건물로 출발한 학교였다. 저자는 “어떤 희망이 윤동주를 현해탄 너머 먼 곳으로 이끌었을까? 그것 또한 문학의 힘이었을까?”라고 말한다.(115 페이지)

 

애도의 두 번째 순서는 나혜석의 수송동 시절에 대한 글이다. 수송동에는 미술학사(美術學舍)가 있었다. 나혜석이 여성의 서양화 교육을 위해 1933년에 설립한 미술 교육기관이다. “수송동 미술학사가 있던 곳은 오래된 골목으로, 조계사와 학교 등이 있어서 변화무쌍했던 종로 거리에서도 옛 건물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위치였다.(133 페이지)

 

나혜석은 자신의 이혼 과정을 서술한 ’이혼고백서‘를 잡지 삼천리에 게재하고 천도교 수장인 최린을 정조유린 혐의로 고소함으로써 스스로 세간의 지탄과 조롱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134 페이지) 문헌에 기록된 미술학사 자리에는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종로 3가 기형도(1960 - 1989)의 공간은 전편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공간이다. 기형도가 서른의 나이로 죽은 곳은 낙원상가의 한 극장이었다. 후배 박해현 기자에 의하면 기형도가 쓴 원고들은 긎고 지운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방에는 원고 습작을 하던 파란색 노트와 알약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즈음 기형도는 자주 두통을 호소했고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입안에 약을 털어 넣었다.

 

편지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소설가 강석경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낸 것이었다. ”나는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은 채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종로3가의 길모퉁이에 서 있다.”(149 페이지)

 

애도의 네 번째 장소는 2014년 5월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 -ㅔ 1973)의 기일에 열린 추모행사장 이야기다. 추모행사장은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한 권진규의 아틀리에였다. 조각가 권진규가 타계한 것이 1973년이니 41주기였다. 아틀리에는 조각가가 타계한 후 30년 넘게 닫혀있다가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창작 공간인 그곳을 사용할 작가를 모집하는 공적 게시물이 보인다.

 

애도의 다섯 번째 공간은 사라진 박물관들이다. 저자는 박득순(朴得錞; 1910 - 1990)의 ’서울풍경‘(1949년 작품)이란 그림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쟁이 터진 후의 서울은 다시는 이 풍경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 폭풍 전의 고요함, 파괴되기 직전의 우아함을 본다고 덧붙였다.(172 페이지)

 

그림에는 조선총독부라 불리다가 미 군정이 들어와 중앙청으로 사용하게 된 웅장한 석조 건물도 있다. 1995년 철거된 건물인데 사람들은 철거된 잔해들을 기념품이라며 가져갔다.(174 페이지) 저자는 그날 이후 사람들은 건물을 삭제함으로써 기억도 말소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옅어지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활동이 반작용처럼 등장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의 어느 하찮은 순간 하나도 삭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중앙청 건물의 적절한 장소로의 이전이었다. 어떻든 중앙청 이야기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경복궁 이야기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내내 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거대한 홍보관 역할을 했으며 총독부박물관과 미술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근정전은 전몰 병사를 위한 참배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17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덕수궁에 있는 미술관과 석조전을 제외하고 모든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이 사라졌다. 해방 직후 적산(敵産)을 불편해 했던 민심 때문에 철거한 것도 아니고 전쟁으로 파괴된 것도 아니다. 국립박물관, 공예전시장, 국립미술관, 장서각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에 궐역을 수복하고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정부의 이념으로 철거되었다. 이제 이들은 옛 신문에서 그 이름을 복기해야만 하는 잊혀진 박물관들이다.(185 페이지)

 

돈암동은 저자가 신혼을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부부가 모두 혜화동을 좋아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하자고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돈암동이었다는 것이다.(191 페이지) 돈암동은 박완서 작가가 살았던 곳이다. 전쟁 직전에 광화문 쪽에서 돈암동으로 옮겨와 매일 전쟁 하듯 살다가 종전 즈음에 결혼하여 떠났으니 3년 정도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동은 박완서의 여러 소설에서 반복재생될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박완서 작가의 돈암동 시절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돈암동에는 검은 기와를 얹은 오래된 조선한옥집이 있었다. ’그 남자의 집‘의 그 남자 현보의 집이었고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지섭의 집이었고 ’나목‘의 주인공 이경(李炅)의 집이었다. 서대문구 현저동은 박완서 작가가 피난해 살던 곳이다. 현저동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좁다란 초가들이 켜켜이 들어선, 도시빈민층이 살던 달동네라고 표현된 곳이다.

 

제목(’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와도 관련이 되는 ’오후, 세 시 학림다방‘편은 전혜린을 위한 장이다. 전혜린은 절친 이덕희와 함께 명동 은성주점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봉구, 김승옥 등도 은성의 단골이었다. “학림과 은성, 돌체, 그리고 모나리자 같은 다방과 카페는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던 안식처였다.”(219 페이지)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학교가 대학로에 있던 시절에 학림은 문리대 25강의실이라 불릴 만큼 서울대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던 아지트였다.”(220 페이지)

 

학림은 지난 해 나도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가 본 곳이다. 일 때문에 박** 팀장님을 만난 자리였다. 고풍스러운 곳이다.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저자 역시 이런 말을 한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2층 다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속은 없지만 왠지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225 페이지)

 

사유의 세 번째 순서는 ’부박한 세상에 외치다 - 성북동 심우장(尋牛莊)과 노시산방(老?山房)‘이다. 만해 스님은 총독부가 있는 방향으로는 얼굴도 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북향의 집을 지었다. 북사면(北斜面; 북쪽으로 향해서 비스듬하게 경사진 면)의 대지에는 북향으로 집이 앉혀지기 마련이어서 기와집의 배치가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성북동에 북향으로 앉은 집이 많다.(234 페이지)

 

“성북동은 적당한 경사가 있고 숲과 나지막한 집이 있고 좁지만 걷기 좋은 길이 있다.”(237 페이지) 근원 김용준은 자신을 노시선인이라 불렀다. 아랫 동네 물가의 수연산방에 살던 친구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유의 네 번째 순서는 ’나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하느니 -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 열전‘이다. 김수근은 장충동 경동교회, 대학로의 예술극장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아비와 아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이기려 한다. 이긴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갈등과 극복은 분명 사회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아버지 죽이기‘라는 오래된 테마를 건축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리라. 건축이란 앞선 결과물을 파괴하고 되살리고 수정하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면서 수천 년을 이어온 것이 아니던가.”(250 페이지)

 

2011년 가을, 서울 옥션에 최초로 부동산이 미술품 경매에 등장했다. 건축가 김중업이 친구인 이정호의 의뢰로 1968년경에 지은 가회동 주택이었다... 300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3층 건물인 이 집은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관저로 잠시 사용되었고 1983년에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20년간 집을 소유하던 주인은 큰 규모의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

 

집주인은 예술품처럼 건축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집을 소유하기를 자랐다. 요구 조건은 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이 집은 주인을 만나지 못해 경매에서 유찰되었다.“

 

이 장에서 읽을 만한 내용은 부여박물관을 설계한 김수근(1931 - 1986)에게 김중업(1922 - 1988)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다. 즉 김중업은 부여박물관 정문이 일본 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인 도리이(鳥居; とりい)를 모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중업은 일본 신사 도리이의 변형이자 그로테스크한 조형이라고 공격하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모방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김수근은 백제의 선도, 일본의 공간도 아닌 현대건축가로서 건축 언어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256 페이지)

 

이 내용을 전하며 건축가 ’조한’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적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또한 형태적 차용이나 모사는 옳지 않은 것일까? 다시금 부여박물관을 봐야할 것 같다. 공간론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다시금 한국적 건축이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원불교신문‘ 2015년 7월 24일 칼럼 ’부여박물관 한국적 건축, 그 논쟁의 현장‘ 참고)

 

저자는 문제의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도 한다. 사유의 다섯 번째 순서는 서촌이다. 저자는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269 페이지) 인왕산을 서쪽의 산 즉 서산이라고 부른 바는 있지만 조선시대에 서촌이라는 지역은 서대문, 서소문 근처를 말했다고 한다.(270 페이지)

 

저자는 여항(閭巷)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이어진 가난하고 평범한 동네라고. 서촌에는 조용히 머물다 오기 좋은 화가의 아틀리에가 두 곳이나 있다. 청전 이상범과 남정 박노수의 공간이다.(285 페이지) 최예선의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생각거리들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책이다. 감사하다. 다만 글씨가 작아 읽기 불편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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