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종호의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는 사대를 앞선 통찰 때문에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13인의 과학자를 다룬 책이다. 13인은 최부, 허준, 전유형, 이중환, 박제가, 정약전, 정약용, 서유구, 김정희, 김정호, 최한기, 지석영, 김용관 등이다. 관건은 ‘조선시대에 과학이 있었는가?’ 이다. 조선시대는 과학이란 말이 없었지만 저자가 선정한 13인은 과학적 마인드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또한 13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유배형에 처해졌던 사람들이다.

 

최부(崔溥: 1454 - 1504)는 3대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을 저술한 사람으로 갑자사화(1504년) 때 참형당했다. 최부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였었다. 갑자사화는 조의제문과 관련해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사형) 등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최부는 1487년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어 제주도로 파견된다.(경차관은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술을 말한다.)

 

그런데 두 달 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맞아 중국 절강성 산문현 주산열도에 속한 대산섬에 닿는다. ‘표해록’은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최부는 놀라운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 때문에 천재로 꼽힌다.

 

부친상을 당한 지 반년만에 모친상까지 당한 최부는 만 4년 동안 부모 상을 치른 후 성종의 부름을 받아 정5품인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중에 ‘표해록‘을 썼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비호에 힘입어 승진을 계속한다. 무오사화(1498년) 때 붕당을 조직했다는 혐의에 따라 장형(杖刑)과 유배에 처해졌던 최부는 갑자사화 때 참형된다.

 

허준(許浚; 1539 - 1615)은 ’동의보감‘을 저술한 사람이다. 허준 역시 유배에 처해졌었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헌정한 허준의 노고를 치하해 양천 허씨에 대해서만은 앞으로 영원히 적서(嫡庶)의 차별을 두지 말라고 명했다.(47 페이지) 허준은 선조가 죽었다는 이유로 유배에 처해진다. 학자들은 허준이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동의보감‘이 탄생하지 못했거나 저술되었다 해도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동의보감‘은 허준 일행이 선조의 명을 받아 집필을 시작한 책으로 저술 1년만에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집필이 중단되었다가 허준 혼자 집필을 계속하였고 유배의 고통 속에서 광해군 시기에 완성한 책이다.

 

전유형(全有亨; 1566 - 1624)은 의병활동을 한 사람으로 의술에 능했고 이괄의 난(1624년)에 참형당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인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바로 전유형이다. 전유형은 최초의 조선인 해부 경험자였다. 전유형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내응(內應)했다는 무고를 받고 참형당했다.

 

전유형은 참형 4년만에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북 괴산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 - 1752)은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사람으로 유배와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이중환의 집안은 노론과의 싸움에서 밀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소론 출신이었다.

 

’택리지‘의 제목은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군자는 살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는 의미의 가거지(可居志)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는 조선시대에 이중환처럼 박해당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중환처럼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하며 그 대표적 인물로 정약용을 꼽았다.(108 페이지)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북학의‘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중 중국에 가장 많이 다녀온 인물이 박제가다. 박제가는 중국에 모두 네 차례 다녀왔다. 박제가가 마지막으로 연행길에 오른 것은 순조 1년인 1801년으로 윤행임(尹行恁), 이덕무와 함께였다.

 

연경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그의 4차 연경행을 주선했던 윤행임이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원망했다는 이유로 엄혹한 심문을 당한 뒤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당했다. 박제가의 사망 연도는 1815년과 1805년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승이자 동지인 연암(1737 - 1805)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서 죽은 것으로 본다.

 

박제가는 당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 경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제가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이 해외통상을 강조했음을 떠올렸다. 이지함은 일찍이 외국과의 무역을 장려해야만 전라도가 부유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조선의 명분론자들은 상업을 멸시했다. 장사를 하면 속임수가 생기는 등 순박한 조선사회가 변질될 것이라 생각했다.

 

정약전(丁若銓; 1758 - 1816)은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의 형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이다. 정약전의 호는 손암(巽庵)이다. 손(巽)은 주역의 한 괘이거니와 손암은 주역을 읽고 점치며 흑산도 유배 시기를 견뎠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뒤 1801년 신유사옥으로 정약종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정약현이 맏이, 정약전이 둘째, 정약종이 셋째, 정약용이 넷째다.)

 

정약전이 신유사옥에 연루된 것은 이벽(李蘗; 1754 - 1785)과 교유하면서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데다 외사촌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神主)를 불태우는 등 조정과 갈등을 빚은 사건에서 발단이 되었다.(이벽은 정약현 부인의 동생이다.)

 

당시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사람 가운데 살아서 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서 당당히 자신을 박물자라고 적었다. 정약전은 이런 말을 했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고 쓰고 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

 

최근 ’玆山魚譜’를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玆)를 검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현으로 읽는다는 것이 근거다. 하지만 玆는 이 자, 검을 자, 검을 현 등으로 쓰인다.(검을 자로도 쓰는 것이다.) 저자는 학문이 한창 무르익을 40대 중반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다행한 일이라 말한다.(165 페이지)

 

정약전이 잠수부나 잠수 장비가 없었던 시절 맨몸으로 물속까지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일을 자세하게 적을 수 있었던 것은 해녀 덕분이다. ‘자산어보’에는 홍어, 상어뿐 아니라 각종 생물에 대한 기록에서 물고기를 해부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자산어보’를 인용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1930년대의 수산학자 정문기는 ‘한국어보도’를 통해 ‘자산어보’를 근대 어류학의 시조로 평했다.

 

정약전은 자신이 과학자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현실적 여건에서 해박한 선구적 지식인이자 박물자로서의 최상의 방법을 찾았다. 이는 그가 과학의 순교자라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다.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은 수원 화성을 건립한 실학자이자 과학자이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에 유배된다. 순조 1년인 1801년의 일이다. 정약용이 수원화성 축조를 위해 고안한 거중기 등은 비록 중국에서 입수한 서양의 과학서적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실제 제작한 것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고안한 것은 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극히 낮았던 조선 후기에서 과학 기술의 눈부신 성과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서양 책 즉 중국에서 간행한 서양 과학 책들을 섭렵했다. 정약용은 광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여 렌즈나 안경의 이치에 대한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현대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바늘구멍상자)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 이름 붙여 연구했던 때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 - 1845)는 조선의 브리태니커 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저술한 사람으로 유배를 자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579개의 문제와 18명의 신하가 제출한 답이 적혀 있다. 채택된 답이 가장 많은 사람이 풍석 서유구다. 총 181개(31.3%)다. 정약용은 117개로 20.2%다.

 

정조는 서유구에게 ”책을 열자 바로 개안(開眼)하는 느낌이다. 근거가 분명하고 충분하며 언어가 걸맞고 정연하여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서유구는 파주 장단 등지로 낙향한 후 정약용과는 달리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히 외면했다.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결과다.

 

그가 택한 길은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잡학지식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서유구는 오비거사(五費居士)를 자처했다. 인생에서 다섯 가지를 낭비했다는 의미다. 1. 젊어서 공부한 시간, 2. 출사해 규장각 각신으로 보낸 시간, 3. 집안이 몰락해 향촌에서 농사와 농학에 매진한 시간, 4. 조정에 다시 불려가 벼슬한 시간, 5.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시간 등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는 금석학의 태두다. 역시 유배 기간을 보냈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길에 오른 것은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1830년(순조 30년) 8월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전 유수(留守)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로 탄핵했다. 탄핵을 한 윤상도는 오히려 옥에 갇혔다. 후에 김정희 아버지가 억울하게 윤상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꾸며졌고 김정희도 사건 종료 10년 무렵 안동 김씨들에 의해 관련자로 거론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고 제주 유배길에 처해졌다.

 

9년의 제주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용산 한강변에서 거했다. 3년 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옹방강 등으로부터 금석학에 대해 영향을 받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김정희가 금석학에 본격 관심을 보인 것은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서부터다.

 

김정호(金正浩; 1804? - 1866?)는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다.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3번이나 돌았고 백두산에는 8번이나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이다. 평민 출신의 김정호는 양반 출신의 혜강 최한기와 신분을 뛰어 넘어 교유했다.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 1803 - 1877)는 조선의 박식가였다. 최한기는 천 여권의 책을 썼지만 현전하는 것은 120권 정도다. 최한기가 그렇게 많은 책을 쓴 것은 소장하고 있던 서양 과학책 덕분이다. 최한기는 직접 과학 기재들을 만들어 실험하고 연구했다.

 

지석영(池錫永; 1855 - 1935)은 종두법을 보급한 사람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가 친일 경력 때문에 삭제되었다. 지석영의 업적 중 한글 보급을 빼놓을 수 없다. 지석영은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창한 선구자이다. 지석영은 일본어를 잘했다. 친일 정권의 한 축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데 적극 가담했고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낭독했다.

 

김용관(金容瓘; 1897 - 1967)은 과학운동의 기수다.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한국 과학의 진보를 역설한 사람이 김용관이다. 평생 가난한 삶을 살다가 간 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