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伽倻山)에 자리한, 영화 ‘명당’의 주제로 다루어졌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는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어떤 기운인지 가보지 못해 궁금하다.
어떻든 사람들은 이하응이 묘자리를 잘 써 아들과 손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남연군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사실이다. 남연군 묘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묘가 독일인 오페르트 일행에게 파헤쳐졌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거나 논의하지 않는다.
결과만 좋으면 그만일까? 명당이라는 곳이 어째서 파헤쳐진 것인지? 비약인지 모르지만 나는 대통령 후보들을 잠룡(潛龍)이라 말하며 지극히 전근대적인 의미를 가진 대권(大權)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경스럽게도 묘가 파헤쳐졌을망정 (명당이어서) 임금을 배출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대권이라는 말은 책임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점만 생각할 경우 쓸 수 있는 말이 아닌지?
가야산은 광해군 아들 이지(李祬)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아들 이지는 강화도의 부속섬인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이지는 폐위된 빈과 함께 땅굴을 파 탈출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죽음을 당했다.
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폐세자가) 마니산(摩尼山)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5월 22일 신해 첫 번째 기사 1623년 명 ‘천계; 天啓‘ 3년)
흥미로운 점은 남연군 이구의 묘가 원래 연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라 두 군데였다. 즉 처음에 연천군 미산면에 남연군의 묘가 있었고 그 후 연천군 군남면으로 이장(移葬)된 것이다.(이렇게 두 번이나 이장된 묘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정만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두 곳의 묫자리 가운데 가야산을 골랐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어서 그대로는 이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이하응은 가야산 주지승에게 가보인 단계 벼루를 선물로 건네고 충청감사를 회유해 가야사의 스님들을 다른 사찰로 보낸 뒤 급기야 가야사는 불태우고 석탑은 부수는 등 무리수를 감행하면서까지 묘지를 만들어 남연군을 이장했다.
남연군의 첫 번째 묘는 마전면 백자동(栢子洞; 현 연천군 미산면)에 있었고 두 번째 묘는 고려 말 도원수를 지낸 현문혁(玄文奕)이 관직에 나가기 전 공부했던 남송정(楠松亭)이 있던 곳에 있었다. 군남면 홈페이지에 의하면 남송정은 피우개 언덕에 있었다. 피우개란 질고 척박해 피만 무성히 자라던 땅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천 군남에 두 곳의 피우개가 있었다. 큰피우개와 가피우개다. 큰피우개는 대직(大稷)이라 썼고 가피우개는 소직(小稷)이라 썼다. 직(稷)은 종묘 사직이란 말에 나오는 사직의 직 즉 곡식 신이지만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시인 하종오의 시)란 표현에 나오는 그 피이기도 하다.
이하응은 후에 아들이 왕(고종)이 됨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별칭이 파락호(破落戶; 난봉꾼), 상갓집 개 등의 표현이다. 상갓집 개라는 표현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아버지의 음택(陰宅)을 위해 온갖 만행급의 행동을 저지른 이하응은 난봉꾼이란 말을 들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철종실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 흥인군, 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부교리 김영수(金永秀)의 상소다. 흥선대원군이 정말 난봉꾼이었다면 저런 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하응에게 어느 정도 난봉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철종의 아들들이 죽자 철종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었을 때의 일을 보자. 당시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었다. 왕족인 이하전(李夏銓;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정통 후계자)과 이하응이었다. 이하전은 강인하고 직설적인 사람으로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안동 김씨들에게도 당당히 맞섰다.
철종 바로 전 왕인 헌종이 승하했을 당시에도 권돈인(추사 김정희의 친구로 추사처럼 '세한도'를 그린 사람)이 강추하는 등 다음 왕의 후보로 꼽혔으나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가 강화도령(후에 철종이 되는)을 택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이하전은 결국 안동 김씨들에게 억울한 역모죄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하응은 그런 권력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몸을 사리며 자신은 권력에 관심 없는 난봉꾼 같은 사람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부교리 김영수가 이하응이 사찰을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다. 알았다면 흥선대원군이 문제의 행동 이후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소설적 과장이 넘쳤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흥선대원군은 네 명의 대원군(선조 부친 덕흥대원군, 인조 부친 정원대원군, 철종 부친 전계대원군, 고종 부친 흥선대원군)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서 대원군이 된 경우라는 점이다.(나머지는 모두 죽은 후 아들이 왕이 되어 추존된 경우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이른 나이에 왕이 된 아들 고종 대신 권력을 행세했었기에 온갖 풍문과 가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관건은 팩트와 상상력 사이의 관계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을 학술 논문 읽듯 엄밀하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에 준하는 노력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실록이라 해도 행간의 의미를 바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자주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때로 실록도 왜곡되기 마련이다.(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이유로 능양군(후에 인조가 되는)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대표적 왜곡 사례지만 주제가 아니기에 후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