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일지 지음 / 어의운하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의 저자인 일지(一指) 스님의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 읽기’는 저자 사후 나온 책이다. 2000년부터 2년간 월간 ‘불광’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출간(2019년 1월) 직후에 샀으나 2년이 지나도록 완독하지 못한 책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궁극의 화두인 붓다’라는 글에서 스님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增長)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證得)하는 기본 전제.“라는 중요한 말씀을 전했다.

 

스님은 ‘대지도론’의 가르침을 전하며 불교는 신앙이라기보다 신심, ‘신해; 信解‘라는 표현을 더욱 자주 쓴다고 말한다.(51 페이지) 절대화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중생 구원력에 대한 믿음, 인간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만이 고통에서 해탈한다는 믿음, 윤회와 업에 관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수신(修身)을 강조한다. ”수신이 전제되지 않은 문화란 거품이다.”...수신이라 하니 유흥(遊興)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전제는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배워야 하는 존재“(‘티벳 사자의 서’의 메시지)라는 말과 상응한다. 스님은 무명(無明)이 탐욕과 증오를 야기시킨다고 말한다.

 

무명이란 환상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교는 인간을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로 긍정한다. 물론 불교는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 깊이 가르치는 종교이기도 하다. 인간 찬미의 극점에 선(禪)과 화엄(華嚴)이 자리한다.

 

불교 수행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할까? 건강한 몸과 마음이다. 이에 대해 스님은 그것은 육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을 닦고 깨닫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최초의 전제라고 가르친다.(6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수행자는 사려 깊고 건강하며 자비로워야 한다.(67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는 행태를 비판한다. ”마음만 깨달으면 되지 경전에는 별것이 없다는 오만은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비극”이다.(69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고 불교도로 지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행위라 말한다.

 

스님은 깨달음 또는 선(禪)보다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경전 연구든 마음의 깨달음이든 자신의 실존이 없이 모방으로 그친다면 그 웅장한 대장경도 번뇌의 백과사전일 뿐이라 말한다. 스님은 난해한 가르침을 고집하기보다 불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연기(緣起)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님은 연기를 상의상관성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실재론적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95 페이지) 그래서 스님은 ‘중론(中論)’을 인용해 존재의 법칙은 연기이며 연기의 본질은 공(空)이며 중도(中道)라고 가르친다. 스님은 해탈이란 신비한 것도 아니고 집중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 상태와 욕구에 대해 사색하고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는 불순한 에너지와 거품을 걷어내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가르친다.

 

임제선사는 해탈이란 물혹(物惑)과 인혹(人惑)의 속임수를 넘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 말했다.(10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탐욕에서의 해탈인 마음의 해탈과 무지에서의 해탈인 지혜(로)의 해탈이라는 두 가지 해탈이 필요하다.(105 페이지) 스님은 해탈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서재나 강의실에서 고담준론으로 해탈을 논할 것이 아니라 남의 눈물을 닦아 주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것이다.(107 페이지)

 

스님은 무아의 길이야말로 해탈의 길이라 말한다. 스님은 무아와 자아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말한다. 불교가 부정하는 자아는 소유형의 자아, 아집, 아만, 아견, 아상에 뿌리를 둔 오염된 자아다. 확립해야 할 자아는 안목과 지혜를 열어주고 해탈과 자비로 인도하는 자아다.(113 페이지)

 

우리는 나, 나의 영혼, 마음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거나 사용할 때마다 그 단어에 합당한 인간 존재의 본질, 영속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아뢰야식 차원의 환상에 빠지기 쉽다.(115 페이지) 스님은 무량수경이 전하는 다섯 가지 대악(大惡)을 말한다.

 

1대악은 살생의 악업이다. 2대악은 도심(盜心)을 품은 사악한 마음이다. 3대악은 항상 사악한 마음에 따라 애욕으로 교란하는 마음이다. 4대악은 탐진치 3독(毒)으로 짓는 구업(口業)이다. 5대악은 술에 탐닉하고 미식(美食)을 좇으며 가족과 스승,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스님에 의하면 우리는 업과 번뇌, 무명에 현혹되어 불건강한 탐욕과 분노의 노예가 된 채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질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투쟁이 가속된다.(129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유심(唯心)은 마음의 자기생성력과 자기회복력을 강조하는 불교사상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삶의 허상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허상과 위선에 오염된 자아를 초극하려는 치열한 세계관을 보여준다.(137 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극하려는’이란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거니와 이는 마음이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다. 마음으로 초극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극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 즉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스님은 발심한 사람을 보살이라 정의한다.(스님은 여성 불자들을 보살이라 하지만 이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간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던 자기 존재를 마음의 깨달음, 불도의 실천으로 돌리는 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143 페이지) ‘대방광불보은경(大方廣佛報恩經)에 의하면 부처님도 한때 지옥 중생이었으나 보리심을 발함으로써 지옥에서 벗어났다.(144, 145 페이지)

 

스님은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욕(忍辱) 즉 참고 용서하는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151 페이지) 스님은 인욕의 원어인 크샨티는 참는 것이지만 더 깊게는 용서하는 것이라 말한다.(사실 참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만큼 중요하다.)

 

스님은 우리는 지금 이 엄청난 속도의 해체,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의 재구축을 위해 불교가 설하는 제법실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61 페이지)

 

스님은 “나날이 마음 쓰기를 풍요롭게 하면/ 도를 이루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보리는 다만 마음으로 찾아야 하거니/ 어찌하여 밖에서 찾아 헤매는가”란 ’육조단경‘의 구절을 소개하며 이 구절을 이른 봄의 황사를 뚫고 달리는 남원행 버스 속에서 읽었다고 말한다.

 

“실상사로 걸음을 옮기던 그날, 실상사는 운봉분지(雲峰盆地)의 낯선 풍경과 정적을 흔들고 지나가는 거센 바람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리산의 웅장한 산자락이 연꽃잎이 되어 둘러싸고 있는 운봉분지의 바람 속에 서 있는 이 옛 선문은 이제 더 원할 것도, 회한도 없이 모든 허장성세를 떨어내어 버린 늙은 비구의 모습처럼 그렇게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국도를 버리고 실상사로 이어진 운봉분지의 옛 길을 찾아 걸으며 이 선문에 은둔해 버린 옛 선승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한여름의 뜨거운 볕에 그을리면서, 겨울의 찬 눈보라 속을 헤치며, 가을의 깊은 우수에 젖어서 이 길을 묵묵히 걸었으리라.

 

그리고 한밤의 실상사 뜨락을 거닐면서 검푸른 별의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붓다를 응시하던 그들에게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었으리라. 실상사가 서 있는 풍경은 그렇게 고독했다.

 

누구든 좋다. 실상사의 깊은 고독만큼이나 삶의 허망한 가지를 다 쳐 내버린 뒤 선(禪)의 길,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는 선승의 자유를 누리고 싶거든 실상사를 향해서 홀로 떠나가기 바란다. 그는 곧 운봉분지의 거센 바람 속에 속기(俗氣)에 찌든 자신을 바라보며 한없이 망설이고 슬퍼하게 될 것이다.”(169 페이지)

 

보살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무엇이라 말했는가?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하면 곧 보살이 아니라 말했다. 육조 혜능으로 하여금 선문에 발을 내딛게 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사용하라)는 의미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그 구절이다.

 

스님은 현대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전문성, 도덕성, 자기 관리 등에 있어서 철저하다는 의미에서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같은 존재이지만 자신의 이익 문제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순점이 있기에 그 점을 극복하려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이른다. 스님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도불교의 정신사적인 활력이 정점에 도착했을 때부터 불교 승려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사막을 건너왔다.

 

나는 그 사막의 푸른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 아래 일부러 노숙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 무모하고 엄청난 도전을 하게 만든 불교의 큰 힘은 무엇일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사막의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말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나그네여, 불교의 큰 물결이 동쪽으로 흐른 힘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이며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네.”(197 페이지) 스님은 고급스러운 깨달음이나 현학적인 교학보다 더욱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은 현대인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며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풀어갈 소박하고도 명료한 행동의 가르침일 것이라 말한다.(201 페이지)

 

스님은 현대 불교를 깊이를 잃은 불교라 진단한다.(203 페이지) 스님은 깊이를 잃은 불교는 현대인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207 페이지) 스님은 이 몸 즐겁자고 하염없이 쌓아가는 악업의 도미노는 명백히 거부하지만 이 몸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그날까지 잘 이끌어야 할 수행의 밑천이기도 하다고 가르친다.(211 페이지)

 

스님은 몸의 수행이 없는 깨달음이란 추단(推斷)일 뿐이며 화려하지만 곧 지워질 가면 위의 화장과도 같은 것이라 말한다.(213 페이지) 불교도들은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 몸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수행을 이루기 위해 몸을 유지해야 한다.(215 페이지)

 

잡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대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책의 편집자는 일지 스님이 불교인문주의자를 자처하며 비승비속의 삶으로 수많은 경전을 탐구해나갔다고 말한다.

 

나는 스님에게서 인문적 천재, 불교에 철저한 스승의 면모를 느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1-09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