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해 동안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글자는 무엇일까? 2음절 이상은 생각나는 것이 없고 1음절 단어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평(平)이란 글자다.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지난 11월 고석정(孤石亭), 마당바위, 송대소(松臺沼), 직탕폭포(直湯瀑布) 등 철원의 지질공원 코스에서 평화(平和)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나름으로는 잘 대처했다고 자평하며 말한 바를 소개하면 송대소의 적벽(赤壁)에서 “적(赤)이란 글자가 있지만 한자에는 이 글자 외에 붉음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더 있지요. 단(丹), 주(朱), 홍(紅), 자(紫) 등이지요.. 공자(孔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붉은 색(‘주; 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했지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평화란 섞였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서 배제해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일방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요. 이 이야기가 오늘 제가 평화를 주제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지요. 조화를 지향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란 말을 한 것이다.
이제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에 대해 이야기 하자. 2019년의 일이니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이유로 말하려는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2019년 9월 2일이 내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일이다. 하지만 이 날은 그저 자격증을 받았을 뿐이니 정식 데뷔일이 아니다. 내가 지질로 첫 해설을 한 것은 2020년 1월 3일이다.
2019년 9월에서 1년이 넘은 2020년 11월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만날 오리산과 680미터 고지가 있는 평강(平康)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지질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느냐?” 물론 이는 나를 겨냥해 나온 말이 아니었다.
시위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원뜻과, 이에서 나아가 방법만을 가르치고 스스로 핵심을 터득하게 함을 이른다는 수사(修辭)로 쓰이는 것까지 두루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란 말이 있지만 전기한 분은 그 지침을 그르친 것이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내가 시연한 좌상바위 지질 해설을 주의깊게 들은 분이었다.
그랬으니 내가 아우라지 베개용암, 백의리층, 재인폭포 등을 50만년전에서 10만년전 사이에 오리산 등에서 분출해 흘러온 용암으로 만들어진 명소들이라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불가피하게 언급했지만 짧게 필요한 부분만을 다룬 것임을 알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평강에 대해 잘 모른다. 수십만년전 화산 분출로 연천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북한 강원도 평강군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지질학자들과 해설사들, 그리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아우르는 당사자들이다. 이제 같은 평(平)자가 들어 있는 평양의 한 궁궐에 대해 이야기 하자.
평강처럼 공교롭게 같은 평(平)이란 글자를 쓰는 이 도시는 당연히 평양(平壤)이다. 평양에는 풍경궁(豊慶宮)이란 궁궐이 있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경복궁을 확장해 짓기까지 한 고종은 평양에 360칸이나 되는 풍경궁이란 행궁(行宮;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특진관 김규홍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 아뢰자 고종은 짐은 벌써부터 이에 대하여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중신(重臣)이 상소를 올려 논하였으니 이제 평양에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백성들이 시의적절하지도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토목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뜻으로 신문고를 치자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아 생긴 현상이라 답한 임금이었다. 그에게 평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종에게 평양은 관서(關西)의 요충지이기에 방비를 강화해야 하므로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경운궁 즉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우측에 전각이 있었으나 1904년 원수부 폐지 이후 건물이 헐렸음)로 하여금 평양 친위대를 재편하라고 명한 곳이었다.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평양에 지은 행궁인 풍경궁은 자혜의원으로 전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멸실(滅失)된 뒤 현재는 그 터에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 평강의 오리산과 평양의 풍경궁(터)...두 곳 모두 갈 수 없는 가운데 평강은 일반인들(예컨대 소이산에 오르는 분들)에게 익숙한 반면 풍경궁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남한 지역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원수부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교과서에 실렸는가 여부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시설이든 인물이든 사건이든 무슨 맥락에서 알게 되는지가 관건이다. 망국 군주(무능함과 무책임함, 반민중적 등)로서의 고종이 주제가 아니니 짧게 말하자면 오늘 주제로 이야기 한 풍경궁은 고종의 어이 없는 허식(虛飾)을 말하는데 필요한 시설이다.
연천에는 장수왕(5세기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임금)의 평양 천도가 계기가 되어 축성된 호로고루가 있다. 우리는 연천이 한국전쟁 이전 북한 지역이었다가 수복된 곳이라는 데에 안도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 북한 지역이 아니기에 호로고루를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감사하게 된다.
평(平)은 의미 있는 뜻들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 고르게 하다, 가지런하게 되다, 편안하다, 무사하다, 이루어지다, 바르다, 갖추어지다, 사사로움이 없다, 화목하다 등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단어는 올해가 아닌 내년에 더 필요한 단어다. 평화(平和)란 입('구; 口')에 밥(’화; 禾‘)이 고루(’평; 平’) 들어가는 것이라 파자(破字)해 말하곤 하지만 2021년의 나에게 평화(平和)의 시작은 음식을 평탄하게, 그리고 울체(鬱滯)되지 않게 먹는 것이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나는 올해보다 더 좋은 내년을 염원하며 마음이 평온한 와이제너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