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쓰기와 글짓기는 별개라 생각해왔다. 악필의 변명인 셈이다.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 짓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글씨는 그 사람(서여기인; 書如其人)이라 하지만 인품 이전에 기능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럼 지도 제작은 어땠을까?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각수(刻手)였다는 말이 있다. 목판에 지도를 새기는 능력도 갖추었었다는 말이다.
혜강(惠崗) 최한기 선생이 ”김정호 선생이 지도를 그리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었으며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마경묵, 이강준, 박선희, 이진웅, 조성호 지음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45 페이지)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가 각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안타까운 점은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선생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재인과 환쟁이는 난전에서 태어나고 난전에서 스러졌느니...“란 시(이달균 시인의 ‘혁필; 革筆’ 중에서)에 그의 얼굴이 겹친다. 난전(亂廛)이 무엇인가?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되지 않은 상품을 몰래 파는 행위나 가게를 의미한다. 김정호 선생에게 붙은 항설(巷說) 가운데 하나가 지도 제작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 죄로 처리되어 옥사(獄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재건(劉在建; 1793 - 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 선생의 죽음이 몰(歿)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만일 김정호 선생이 죄인으로 죽었다면 물고(物故)라 표현되었을 것이란 의미다.
만일 지도 제작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에게 재정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최한기 같은 분이 처벌당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도 김정호 선생이 죄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김정호 선생이 세종이나 정조 시대에 살았더라면 필시 실록에 실릴 정도로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시니어 신문 2016년 9월 9일 기사 ’역사소설 <대동여지도 고산자의 꿈> 출간‘)는 주장이 있다. 김정호 선생 이야기를 한 것은 재인(才人)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옹기장이와 사당패 재인의 사랑 이야기‘란 부분이 있는 책(이수광 지음 ’명인열전‘)에서 김정호 선생 이야기를 접하게 된 까닭이다. 재인처럼 김정호 선생도 떠돌이 인생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