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해설을 하고 평창 상원사와 월정사를 거쳐 고성 델피노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당시 나는 올해 5월 있었던 고성 화재 소식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일정이 되지도 않았지만 되었다 해도 그 생각을 아예 못했으니 일행에게 현장에 가자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답사는 늘씬하고 굵은 최상의 소나무들을 본 일정이기도 했다. 그랬으니 고성에 갔다면 아마도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나무 상황을 보며 마음이 많이 착잡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숲해설사 동기방을 통해 고성 현장 소식을 들었다. 뉴스나 사진을 통해서는 별 감응이 없겠지만 직접 가서 보면 처참하다는 것이 동기의 전언이었다. 나무의 나이테(annual zone)에는 나무의 나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세한 기상현상까지 전부 담긴다. 화재도 예외가 아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보도이지만 공룡이 살아 있던 백악기 중기 지층에서 당시 살아 있던 나무 뿌리와 포자, 꽃가루 화석이 발견되었다.(202042일 연합뉴스 기사 얼음 덮인 남극, 9천만년 전 공룡시대 땐 울창한 숲이었다‘..영국 노섬브리아 대학교 지리환경과학과, 독일 헬름홀츠 극지해양연구센터 알프레드 베게너 연구소 과학자들) 이는 공룡시대에는 남극이 울창한 숲이었음을 말해준다.

 

남극의 만년설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찾다가 이런 뜻 밖의 사실을 접하게 되니 금맥이라도 찾은 듯 하다. 남극과 그린란드 등에 내린 눈이 얼어 형성된 만년 빙하라 해온 얼음층을 분석하면 눈이 내릴 당시의 기온을 알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는 세계사’ 17 페이지) 기후를 포함한 자연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큰 강과 비옥한 범람원이 없는 관계로 땅이 척박했던 그리스는 농업 기반이 제한된 까닭에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만드는 대신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를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그리스에 수준 높은 토론 문화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생겼고 이는 과학 발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저술가 필립 블롬은 소빙하기(14세기 초부터의 몇 백년 동안)가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주장을 한다. 날씨가 추워지자 곡물 수확이 감소했고 이는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의 사회질서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 봉건 체제에서 잉여 생산물이 없게 되자 농노들은 봉건 영주에게 바칠 것이 없어지고 수확이 급감한 지역은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야 했기에 화폐가 결정적으로 확대 사용된 것이다.

 

조선 시대 사회상도 기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기상 재해가 빈번했던 시기가 중종(71), 현종(60), 명종(40) 재위시다. 바로 이 중종 13년인 1518년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왕에게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으나 후에 다시 지진은 물론 우박과 수해까지 이어지자 조광조 세력은 훈구파의 역공에 속수무책이었다. 즉 훈구파는 조광조 세력이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기후 문제이기도 하고 조광조의 미숙한 대응이 초래한 문제이기도 하다.

 

충북대 박원규 교수는 목재연륜학적 조사를 통해 1835년에서 1848년 사이에 혹독한 저온기가 있었음을 밝혀냈다.(2010514일 사이언스 타임즈 기사 ’‘나이테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시기는 헌종 재위기(1834 1849)와 거의 일치한다. 헌종은 혹독한 저온기가 시작되기 1년 전에 임금이 되었고 그 시기가 끝난 지 1년 후 승하했다. 헌종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임금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이 건물은 헌종이 승하하기 2년전 건립된 건물이다.

 

대체로 이 건물은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이라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혹독한 저온이 재위 내내 이어져 기근이 일상적이었는데 무슨 여유가 있어 단청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치스러울 수 있었는데 검소하게 지었다면 대단한 것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당연히 검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여유가 없는데도 사치스럽게 지은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대단한 일인 양 말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여유가 있는데 검소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헌종의 경우 혹독한 시기에 낙선재를 지은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역학만 헤아리는 것도 문제고 자연 조건에 너무 비중을 두고 사태를 보는 것도 문제다. 단 역사를 자연을 키워드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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