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
랜디 올슨 지음, 윤용아 옮김 / 북스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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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자주 듣는다. 당연하지만 재미 있는 강의도 있고 지루한 강의도 있다. 지루한 강의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강사가 주제 없이 정보들을 나열하기만 해 재미 없었다.” 물론 이 말은 반만 맞는다.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해도 주제가 없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라면 강사가 정보들을 나열하기만 한 것은 사실이기에 맞는 말이다. 내가 잘못 파악한 부분은 무엇인가?

 

저자는 ABT(and, but, therefore) 구성을 제안한다. 그리고, 하지만, 그러므로 구성이다. 가령 캔자스의 농장에 한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무료하다. 하지만 어느 날 토네이도가 그녀를 휩쓸어 신비한 나라 오즈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같은 문장이 바로 전형적인 ABT 구성의 문장이다.

 

그런가 하면 AAA(and, and, and) 구성은 어떤가? 가령 이런 문장이다. ”사람들이 걷는다. 그리고 몇몇은 개를 데리고 있다. 그리고 해가 쨍쨍하다. 그리고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가? ABT 구성은 흥미를 유발하는데 비해 AAA 구성은 지루하고 재미 없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정보의 나열은 이야기가 아니고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저자에 의하면 서사 또는 이야기는 문제 해결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223 페이지. 언급된 게 정보뿐이라면 이야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224 페이지)

 

저자는 이채(異彩)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뉴햄프셔대학교 해양생물학과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남가주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에 진학에 할리우드 영화계로 진출한 것으로 저자의 삶이야말로 ABT 구성을 보인다. 오디세우스를 좋아해 랜디와 오디세우스를 결합해 랜디세우스라 자칭하는 저자는 하버드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호주의 그레이트베리어리프의 한 섬에서 1년을 살았고 남극의 빙하 밑으로 다이빙도 했고 반 마일 깊이의 심해에서 잠수도 했고 60피트 깊이의 해저 서식지에서 일주일이나 지냈다.

 

그리고(A) 해양생물학과의 종신교수가 되었다. 하지만(B) 동부의 과학 세계를 떠나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향해 영화학과 석사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T) 그에게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는 것이었고 언젠가는 과학계로 돌아가 할리우드에서 배운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과학계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20년이었다.

 

과학계와 영화계를 모두 경험한 저자는 그 두 분야의 특성을 이렇게 파악한다. 과학은 서사의 구성과 진행을 따르는 분야지만 과학자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과학자는 학부 시기에 인문학을 건너뛰고 과학자로서만 최대치의 훈련을 받기 때문이라고.(65 페이지)

 

38세의 나이에 새로운 여정에 들어설 때까지 서사의 힘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이 목격한 베테랑 시나리오 작가의 경우 서사적 직관을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귀띔한다.(서사적 직관이란 말은 이야기 센스라는 말을 인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학계의 안주(安住)는 정년 보장과 큰 연관이 있다. 이에 비해 할리우드는 과거의 화려함이 어떻든 흥행에 한번 실패하면 언제 재기할지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면 청중이 흡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뇌는 특정한 방법으로 엮인 정보가 필요하다,“(54 페이지) 관건은 복잡한 사실을 구체화해 간결하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전이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 결과 재미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뇌 반응도는 낮고 재미 있는 이야기에는 높다. 중요한 사실은 서사가 없으면 지루하고 있으면 흥미롭고 과도하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23 페이지)

 

단 서사적 직관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35 페이지) 정리하면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해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ABT 유형의 사건 또는 반전이 알맞게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강조점도 필요하다. 가령 진화론이 빠지면 생물학은 그저 잡다한 요소가 된다. 어떤 요소는 흥미롭고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의미 있는 큰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같은 말을 보자.

 

진화론 즉 서사가 빠지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지만 잡다할 뿐이라 말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피치라는 말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자신의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핵심을 간결하고도 인상 깊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ABT 구성에 맞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쓴 숭의전에 대한 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반전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자주 언급했다.

 

임진(臨津)팔경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파주 지역에만 국한되었지만 연천 지역에도 팔경이 있다고 한 점도 그렇고 이성계가 예성강에서 띄운 돌배<석주; 石舟>가 임진강까지 흘러왔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며 실제 여부를 말하지 않고 강() 또는 물길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한 점도 그렇다.

 

저자는 과학자에게 효과적 커뮤니케이션의 짐을 지라고 말한다. 수십 시간의 고민을 하고 몇 차례의 원고를 거치고 자료를 다듬어 청중의 뇌에 있는 둥근 수용기에 부드럽게 들어맞을 원통형 발표를 만들라는 것이다.(131 페이지) AAA는 귀납법이고 ABT는 가설연역법이다. 가설연역법은 발견된 패턴을 설명할 수 있을 법한 모든 가설 중에서 고민하고 실험하기에 시간 낭비인 것부터 쳐내는 방식이다.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이어가는 것은 반전이고 They say..I say 형식의 문장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의 문장이다. ‘하지만을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은 필연적이다. 스토리텔링에서 갈등은 음악에서 소리와 같다.(141 페이지) 서사의 방향은 한 번만 바꾸는 것이 좋다.

 

DHY는 그런데도(Despite), 할지라도(However), 그렇지만(Yet)을 의미한다. 서사가 너무 많은 경우다. ABT에 단어는 몇 개여야 적당한가? 직관에 따라라. 정해진 길이는 없다. 때에 따라 한 개 이상의 ABT가 필요할 수도 있고 청중이 누군가에 따라 각기 다른 ABT를 작성해야 할 수도 있다. 궁극적 목표는 서사적 직관을 기르는 데 있다. 직관적으로 서사의 문제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171 페이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황금열쇠를 선별해낼 수 있는 서사적 직관이 필요한 것이다.(173 페이지)

 

ABT 구조를 잘 잡으면 사람들이 강연자의 주장을 따라가기 쉽고 강연자도 자신의 글을 기억하기 쉽다.(204 페이지) 이는 나도 평소 공감하던 바이다. 다만 나는 흐름이 좋은 글은 글쓴이 스스로 기억하기 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자는 수없이 많은 과학책을 읽었지만 내용의 핵심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은 거의 없다고 말하며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은 예외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나선은 여러 부분이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말한다.(204, 205 페이지)

 

저자는 왓슨의 책이 유명한 것은 생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 책이 서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에 의해 집필되었다면 밋밋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공감한다. 하지만 내용(사건)과 서사적 역량이 함께 중요한 것이 아닌지? 서사적 역량만으로 밋밋한 이야기를 멋지게 이끌고 갈 수 있을까? 물론 이야기 거리가 되는 사건을 찾(아 쓰)는 것이 관건이긴 하다.

 

저자는 아직도 서사의 세계라 말한다. 과학 연구 지원 단체의 이야기가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즉 그들은 현존하는 것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 대한 실험에는 관심이 없다. 모두 뚜렷한 패턴이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지원하고 싶어한다.(239 페이지) 저자는 서사라는 것은 평생의 공부이며 누구도 완벽한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261 페이지) 아무리 스필버그라도 그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있다. 이것은 끝없는 도전이다.(262 페이지)

 

사실 저자는 할리우드로 진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정보와 방향이 잠재되어 있어서 정리하려면 며칠 더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적법한 훈련과 시각을 통해 누구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자 가르침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저자가 만난 가장 완벽한 과학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다.(내가 좋아하는 과학자여서 반가움이 크다.) 다시 굴드의 책들을 정독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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