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 한다, 잘난 척 한다 등의 말을 듣고 한 마디 한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는 척, 잘난 척 하지 않는 것이겠다. 만일 자신들은 그렇게 하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거나 남의 그런 모습은 못마땅해 한다면 이율배반적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아는 척 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문제적인가? 영국의 박물학/ 과학사회학 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 1995)의 질문이 떠오른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대작을 집필한 니덤은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정인경 교수는 니덤의 질문은 유럽이 본래 우월하기 때문에 과학혁명이 일어났다는 안일한 대답을 피하기 위해 한 질문이지만 무엇이 일어났을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문제라는 말을 했다. 가령 어떤 집에 불이 났다면 왜 불이 났는지를 물을 수는 있어도 불이 나지 않은 집에 대해 왜 불이 나지 않았는지를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정인경 지음 모든 이를 위한 과학사 강의’ 122 페이지)

 

철학자 베르그손은 이를 추후적 사고의 오류라 설명했다. 물론 나는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이유로 아는 척 하지 않는가?”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척 하지 않는 이유는 1. 겸손해서인가? 2. 귀찮아서인가? 3. 콘텐츠가 부실해서인가? 4. 자신이 애써 공부한 지식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인가? 어떤 경우든 문제적이다.

 

겸손해서 그렇다면 그나마 낫지만 이 경우도 모임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귀찮아서 지식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능동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귀찮아서 공부나 글쓰기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만 마지 못해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해설사들은 다 수준이 같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다.

 

콘텐츠가 부실하다면 상대에게 아는 척 한다고, 잘난 척 한다고 말하지 말고 자신의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순리다. 여우가 따 먹으려 했으나 높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 포도를 보고 저 포도는 신포도일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지식이 부실하니 지식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인가?

 

애써 공부한 것이기에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공부한 것을 나누는 선학들이 있기에 지식을 얻고 공부할 수 있는 것임을 감안해 보라. 자신은 혜택을 입고 나누지는 않는 것은 이기적이다. 물론 누린 만큼 베풀 수는 없다. 능력면에서든 시간적인 면에서든 방법면에서든.

 

상대를 무시하며 아는 척 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아는 척을 잘 하기에 공손하게 말하려 한다. 내가 상대를 무시했는가?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잘난 척 한다, 아는 척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격지심(自激之心)을 발동시키는 것일 뿐이다. 세상 상식과 속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독 지식적인 면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인가?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

 

그들은 지식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 그래서 나 같은 장삼이사가 고급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것인가? 내가 신성모독이라도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오히려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 늘어놓는 사람들이 놀랍게 보인다. 이해하기 어렵다.

 

나라면 닳고 닳은 이야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재미도 없어서 못한다. 단 나도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어설프고 부끄러웠고 초라했고 사소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런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만일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안주(安住)하고 결국 정체(停滯)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진경 교수는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용한 기하학적 서술방법을 과학에 대한 환상을 주려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지만 어느 시기 이후 스피노자가 하려고 했던 것이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리학적 윤리학 즉 자연학적 윤리학의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이진경 지음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170 페이지)

 

나는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니체가 스피노자를 통해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치열하게 노력하되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이진경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지식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이상한 논리를 고집하기에 문제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공부는 느낌이나 정서적인 면으로 치우치려는 자신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물론 논리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되면 메마르고 거친 세상을 만들게 된다. 나에게 아는 척 한다, 잘난 척 한다 등의 말을 한 사람들은 생각을 촉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말로 생각을 촉발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고 소중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