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식물(속씨식물)의 화분의 기능 형태학적 연구 논문으로 박사가 된 이상태 교수의 식물의 역사에서 수 백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단백질, 수 천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이루어진 핵산으로 구성된 세포 이야기를 읽는다. 프랑수아 자콥(1910-1976)'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핵산이 기억과, 단백질이 욕망과 나란히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핵산과 기억, 욕망과 단백질의 가공할 혼합물이다. 저물어 가고 있는 이번 세기에는 핵산과 단백질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다음 세기의 관심사는 기억과 욕망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자콥의 말은 환원적(reductionism)으로만 보던 생명현상을 창발적으로 보려는 생물학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환원주의는 여러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이고 간결한 설명은 감정의 분자라는 책에서 저자 캔더스 퍼트가 제시한 개념이다.

 

퍼트는 환원주의를 가장 작은 부분들을 조사한 뒤 그것들을 외삽(外揷 - extrapolation; 수학에서 원래의 관찰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변수와의 관계에 기초하여 변수의 값을 추정하는 과정)하여 전체에 관한 보편적인 가정을 이끌어냄으로써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설명했다.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자는 서양과학의 토대를 이루는 환원주의적 성격은 지속적 과학 발달과 더불어 학문에 대한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어 유전학과 생화학, 생물학과 물리학, 인문학과 자연과학, 과학과 예술의 각 분야에서 소수의 전문가와 다수의 문외한들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콥은 생명현상을 레고 놀이에 비유했다. 생명계는 레고 놀이와 유사한 것으로 요소들이 거의 고정된 조합체로 형성된 것이며, 복잡한 작용 방식을 결정하는 유전자나 유전자군의 조각들이 다양한 배열에 따라 조립된 것이란 의미이다.

 

진화에 의해 수반된 복잡성은 이미 존재했던 요소들이 새롭게 재정비되어 형성된 것으로 새로운 형태, 새로운 표현형의 출현은 종종 이 동일한 요소들의 참신한 조합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자콥의 책에는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도 나온다. 강을 건너야 하는 전갈이 헤엄을 치지 못하자 개구리에게 부탁해 업고 강을 건너달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에게 넌 나를 찌를 것이라 말한다. 그러자 전갈이 그러면 둘 다 빠져죽을 테니 그러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개구리는 반신반의하며 전갈을 업고 강을 건너게 된다.

 

중간쯤에 이르자 전갈이 개구리를 찌르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개구리는 죽어가면서 물었다. 왜 나를 찌른 것이냐고. 전갈은 천성 탓이라 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자콥은 전갈은 찌르느냐 마느냐라는 두 가지 선택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기에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멍청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전갈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본성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콥은 생물학의 역사는 유물론과 환원론, 그리고 생물계 구조와 기능의 단위체를 향하여 계획 없이 나아가는, 혼돈스런 긴 행로와도 같다는 말을 한다. 자콥에 의하면 파리는 생물학의 가장 근본적 문제들 중 하나인 배() 발생 연구를 위해 선택되었다.

 

자콥은 생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자콥은 이 동물이 특별히 특성 종양을 가지고 있어서 연구 대상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828일 광화문 해설 시간에 염상섭 좌상을 주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나로서는 그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 소설에서 개구리가 실험대상으로 나오지만 생물학 실험 또는 연구의 주된 대상은 파리와 생쥐였다.

 

눈에 띄는 것은 다음의 공통점이다. 식물에 대해 관심과 궁금증이 많은 분들을 위해 오래전부터 전문적이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책을 쓰고 싶었다는 이상태 교수의 글과 자콥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지만 위대한 책을 썼다는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자의 글이다.

 

쉽고 간결하고 의미까지 잘 담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물론 우리는 우리 역시,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본성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쉽고 간결하고 의미까지 잘 담은 책이 아니라 해도 실망하거나 힘들어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는 노동이자 온몸으로 수행하는 수련인 독서”(여성학자 정희진씨의 말)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새롭게 받아들인 타자의 글을 자신의 기존 지식장에 재배치하는 지식 생산 과정에 쉬움까지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나친 생각이다. 아직 접하지 못한 책을 만나면 좋은 벗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이미 접한 책을 만나면 옛 벗을 만난 듯 하라(독미견서 여봉양사; 讀未見書 如逢良士, 독이견서 여우고인; 讀已見書 如遇故人)는 말을 조금 바꿔 어려운 책이라도 만나면 좋은 벗을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전문적인 의미를 쉬운 표현으로 담아낸 책을 만나면 옛 벗을 만난 듯 여기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런 대세와 무관하게 늘 쉽게 쓰도록 애쓰는 것은 내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부과한 과제이자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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