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슷한 듯 다른이란 표현을 쓰고 관련 단서를 수습(收拾)하다가 찰스 다윈 이야기를 찾기에까지 이르렀다.(수습이란 어수선하게 흩어진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지만 파악; 把握하다는 말이 1차적으로 꼭 잡아쥐는 것을 의미하고 2차적으로는 어떤 일을 잘 이해해 확실히 아는 것을 뜻하듯 수습도 물건에서 나아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물건을 쥐어보아야 온도와 결 등을 통해 느낌을 알 수 있으니 이해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다윈은 딱정벌레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케임브리지에서 한 일 중에서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열의를 갖거나 큰 기쁨을 느낀 일은 없을 것이다.”(’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61 페이지) 알다시피 딱정벌레는 생물학자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 1892 - 1964)을 소환하게 하는 동물이다. 홀데인은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조물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를 병적으로 좋아하셨나 봅니다(that God is incredibly fond of beetles)“란 말을 했다. 동물 중 가장 많은 종()을 차지하는 것이 딱정벌레다.

 

다윈은 수많은 관찰 일기를 남긴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그 방대한 기록도 그가 자연선택이론을 만들어 질서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해석 불가능한 단순 자료뭉치에 지나지 않았다(김경만 지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110, 111 페이지)는 사실이다. 갈라파고스에서 다윈은 핀치새의 부리 모양이 섬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핀치새들이 섬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적응할 수단이 있으면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하면 자연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다.(장수철, 이재성 지음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 26 페이지) 정리하면 내가 어제 물은 사촌 종 사이에서 비슷하면서 다른 꽃이 피어나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고 차이일 것이다.

 

어제 질문은 청계산에서 초본식물 야외 수업을 받고 하게 된 질문이다. 상당히 지치고 힘들었지만 집에 돌아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란 책을 보았다.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같은 꽃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린 내용 12 꼭지로 구성된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시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고, 예민한 가시 같은 감각을 견지하고, 주제를 꿰뚫는 가시 같은 언어로 사물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118 페이지)

 

메타포로 빛나는 인문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전문가란 자신의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다 해 본 사람이라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말보다 부담스런 말이기도 하고 의욕을 자극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보어는 전문가는 해당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굵직한 실수들 몇 가지를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여담이지만 보어는 노벨상 수상 이후 태극 문양(紋樣)을 가문의 문양으로 삼은 사람이다.(보어는 주역에 심취했던 서양인들 중 라이프니츠 만큼 흥미로운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의 자연과학자는 가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무에게는 가시가 방어기제의 하나이지만 사람에게는 방어뿐 아니라 각성의 도구이기도 하다.“(105 페이지) 어제 여섯 시간의 야외 수업을 받고 돌아와 지친 나머지 위의 글을 읽었으나 글로 연결하지 못했다. 각성(覺醒)의 내공이 부족해 나도 모르게 잠에 곯아 떨어진 나는 가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치면 눕게 되고 그러면 몸은 가시의 꼿꼿함과는 아주 다르게 연체(軟體) 동물처럼 무장해제된다는 말이 가능하다.

 

위 책의 자연과학자가 사람에게 가시는 각성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말을 했거니와 나는 가시의 꼿꼿함을 보며 경책(警策)이란 말을 떠올린다. 사실 피곤하고 지쳤을 때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은 잠을 부르는 초면(招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독서는 잠에 빠지기 전의 공허한 짧은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눕지 말고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란 책에 공부는 독하게, 시험은 즐겁게란 챕터가 있다. 연우라는 아이의 이야기로 그녀는 어떤 일을 하다가도 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공부에 몰두하는 스타일로 MIT에 입학해 박사과정(2014년 기준)을 밟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9포인트 크기의 작은 글씨로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는 점이다.(연우는 고교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230등의 순위를 받고 독하게 공부해 2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20등에 올랐고 그 해 기말고사에서 전과목 1등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대체의학서처럼 말하자면 눕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각성과 수면의 경계가 와해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빗장을 푸는 일이다. 반면 앉기는 읽을 수 있고 구상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성과를 모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다윈이 노트했듯, 연우가 노트했듯 해야 한다. 단 의미부여나 완전한 파악이 수반되어야 한다. 책을 쓰거나 이론을 만들려면 의미부여를, 시험을 보려면 최소한의 의미 파악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화룡점정은 그런 상황에 쓸 수 있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