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 소진사회의 인간과 종교
김화영 지음 / 나다북스(n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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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집을 읽고 난 느낌은 좋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느끼는 기쁨 이상일 수 있다. ‘이론과 이론 기계‘, ’힘의 포획등을 쓴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나다 공동체 대표인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가 그런 책들이다. 오길영 님은 에세이의 뿌리는 감상적 체험의 글이 아닌 지성과 개념이며 에세이의 문체는 현란한 글재주가 아니라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라 말한다.

 

김화영 님은 자신의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통찰과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려 장치들에 포획당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비극적 자본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웃음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에세이는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글과 공명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린다는 김화영 님의 말과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김화영 님은 주체(subject)라는 라틴어가 주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툼과 종속된 것 또는 하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투스라는 두 개의 어원을 갖는다는 말을 한다. 자발적 복종 주체가 되기도 하는 주체의 역설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오길영 님도 주체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체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두 저자의 주체론은 배경이 다르다. 김화영 님은 장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는 차원이고 오길영 님은 유아론(唯我論)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차원이다. 장치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인간 주체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것이다.

 

김화영 님은 장치를 설명하는 장에서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말하며 내부는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외부도 내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부와 외부는 상대방 없이 정해지지 않으며 둘을 나누는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길영 님은 사람이 배우는 것은 오직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나하고 생각이 다른 책을 읽을 때, 익숙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는 오길영 님이 말한 지성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마음 공부라는 장을 통해 나는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어떤 사유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김화영 님의 마음론은 색다르다. 김화영 님은 마음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이 제시하는 대안은 지성에만 의존해오던 공부를 지양하고 지성과 마음이 하나가 된 온전한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칸트는 물() 자체(自體)는 보이지 않기에 알 수 없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나오는 입력된 코드 그대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 자체다; 진은영 지음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70 페이지)

 

후설은 장미를 보면 감각기관에 수용된 그대로 장미가 인식된다는 칸트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만일 그렇게 기계적으로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장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게 제각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후설의 말을 풀어보면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에 따라 세계를 본다는 말이 된다. 후설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이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이끌림에 반응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에 대해 논하며 일상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일상에서 습관적으로(별다른 지향 없이) 행동하고 사유하는 우리에게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의 순서를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너무 친숙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습관화된 세계가 깨지는 것은 세계를 지탱하던 방식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기존 세계가 존속되도록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상이다.)

 

후설의 제자인 메를로 퐁티는 마음의 지향이 이미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했다. 하이데거가 세계 - - 존재인 우리가 늘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퐁티는 우리의 마음의 지향 작용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화영 님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경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어쩌면 신체 경험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길영 님은 물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진은영 님의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거론한다. 진은영 님은 선험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개성이라 말한다. “우리는 물자체와 직접 만날 수 없고 단지 감성과 오성(悟性)이라는 형식의 매개를 통해서만 사물과 관계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은 항상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유는 선험적 도식론에서도 계속된다.”(’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211 페이지)

 

네그리와 하트를 인용해 진은영 님은 매개 없이 우리는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철학적으로 칸트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된 매개 메커니즘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는 의회나 합의기구라는 대표제를 작동시킨다.”는 말을 한다.

 

오길영 님은 진은영 님이 주로 기대는(의거하는) 니체, 들뢰즈, 네그리 등의 탈근대적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답을 시도하고 그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하며 자신에 찬 모든 직접적 형식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이들보다는 우리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탐색하는 칸트의 겸손함에 마음이 쏠린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오길영 님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런가 하면 김화영 님이 언급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칸트, 후설, 하이데거, 퐁티 가운데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하이데거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약천 남구만 등 조선의 문인 - 정치인 가운데 누가 가장 두 영역에서의 괴리가 적은지를 논할 때 우리는 남구만을 들지만 위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단연 하이데거를 들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이데거는 부정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에 하이데거 이야기가 나온다. 박찬국 님이 쓴 하이데거와 나치즘을 읽고 쓴 서평 형식의 글인 사상과 정치라는 글에서다. 박찬국 님은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그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는 악성의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는 없고 양자 사이에 우연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는 현실 정치로서의 나치즘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과 그것의 이념적 표현인 니힐리즘, 그리고 니힐리즘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극복할 대안으로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번쩍 혹은 아하 하는 초월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경험이다.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규칙적인 종교생활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환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치 유희와 같아서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놀이이기도 하고 삶에 자리한 고통들을 유유히 견뎌내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희망이기도 하다. 다시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분의 존재도 아니고 세계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삶은 그저 나의 길을 함께 가며 웃는 것, 비극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운명과 자유의 놀이터다.“, ”모든 것이 있게 하라! 다만 모든 장치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게 하면서.“ 김화영 님에 의하면 마음은 우리의 지향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창조적 근원지이고 기도는 마음의 통로로 걸어내려가 그 안에 깃든 신성을 만나는 문이다.

 

김화영 님의 결론은 영성(靈性) 신학자의 해답답다. ”비극을 침묵으로 견디고 마침내 눈을 뜬 이들이 모든 존재 안에서 신을 보는 날, 비로소 삶의 수수께끼들이 풀리며 빛을 보게 되는 그 날이 바로 우리의 시간, 영원한 지금이 될 테니까.”란 결론은 신비한 만큼 희망적이다.

 

노력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다. 그게 인간답다. 그러나 가 하는 노력의 중요한 전제는 그런 노력을 한다고 욕망이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유몰론자의 윤리를 설명한 오길영 님의 결론도 좋고 영성 신학자 김화영 님의 결론도 좋다.

 

칸트의 겸손에 마음이 쏠린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생각해본다. 맥락이 일치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나보다 공부가 깊고 영성에 접()한 김화영 님의 인도를 따라 내 인식 밖의 영역에 열린 유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이 김화영 님의 책을 읽고 얻은 결실이라면 결실이다. 묵직한 중수필, 지성과 사유의 깊이를 느낀 책을 읽게 해준 두 분께, 특히 내게는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뜨게 해준 김화영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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