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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과 몽촌토성 : 침묵에서 깨어난 한성 시기 백제의 도읍지 ㅣ 신나는 교과연계 체험학습 16
김기섭 지음, 서은경 그림, 이이화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성 시기 백제의 도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북성(北城)인 풍납토성은 39만 제곱 미터, 남성(南城)인 몽촌토성은 48만 제곱 미터의 면적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부여 백성들 일부가 남하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한성 시기는 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성(城)이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은 담장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곳을 말한다. 칠지도로 유명한 근초고왕(13대) 때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혀 가며 한반도의 서쪽과 남쪽 지역에서 위엄을 떨쳤다. 근초고왕 때 고구려와 벌인 전쟁(평양성 전투)에서 백제는 고국원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일로 광개토왕대왕비에는 백제가 아닌 백잔(百殘)이라 기록되어 있다. 잔은 잔인하다는 의미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21대)은 목숨을 잃었다. 다음 왕인 문주왕은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웅진 백제는 475년에서 538년까지 지속되었다. 무령왕(25대) 때 안정을 찾았고 다음 왕인 성왕(26대) 때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겼다. 국호는 남부여로 고쳤다. 사비 백제는 538년에서 660년까지 지속되었다.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세운 첫 나라다. 시기를 보아서도 백제의 최전성기는 한성 백제 시기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고 가장 먼저 망한 나라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 주몽은 부여 사람이었다. 주몽은 부여 왕자들이 시기해 죽이려 하자 졸본 부여로 도망쳐 왔다.
당시 졸본 부여의 왕은 주몽을 눈여겨 보았다가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시켰다. 졸본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은 왕이 되었고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 온조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주몽이 죽고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 잡았고 온조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54개 부족 국가인 마한 땅을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갔지만 비류는 그러지 못했다. 비류가 도읍으로 삼은 미추홀이 농사가 잘 안 되어 백성들의 삶이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류가 이끌던 세력도 온조가 흡수해 백제가 되었다.
백제는 왜(倭)와 가까이 지냈다. 왜에 한자와 유교를 전해준 것이 백제고 갖가지 기술을 가르쳐준 것도 백제다. 칠지도(七枝刀)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다. 백제는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는 위기를 맞는다. 개로왕이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다. 아차란 말이 붙은 것은 조선 명종이 홍계관이란 점쟁이를 실수로 사형시킨 곳이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5년(을축년) 대홍수 때다. 1990년대 강남에 아파트 단지를 짓는 중에 성벽 안쪽을 파헤쳤다. 1997년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의 초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몽촌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올림픽 개최로 인해 공원이 조성되는 과정에서였다.
풍납토성은 하늘에서 보면 성벽이 일직선이다. 흙을 층층이 다져 가며 성을 쌓는 방식을 판축법이라 한다. 몽촌토성 안팎에는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 김구의 신도비가 있다. 몽촌역사관, 집자리 전시관도 있다. 몽촌토성은 위에서 보면 성 모양이 찌그러진 마름모꼴임을 알 수 있다.
성과 성 밖을 물로 가로막은 것을 해자라 한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작은 성을 보루라 한다. 성곽의 기초적 형태로 적군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도록 나무를 땅에 박아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담을 목책이라 한다. 성벽 중 다른 곳보다 3에서 5미터 정도 높게 쌓은 곳을 토단이라 한다.
몽촌토성은 산에 쌓은 성, 풍납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다. 산에 쌓았기에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하다.(몽촌토성) 평지에 쌓은 성이기에 일직선이다.(풍납토성) 백제 왕들은 제사를 자주 올렸다, 시조인 동명왕과 하늘에 드렸다. 남쪽에 제단이 있었다.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토기는 구은 강도나 흙의 질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한성을 함락시키고 평지성인 풍납토성 대신 산성인 몽촌토성에 주로 머물렀다. 몽촌토성은 방어용으로 지은 성이다. 풍납토성은 백성들이 사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몽촌토성은 낮은 곳은 판축법으로 쌓아올리고, 높은 곳은 삭토법으로 깎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