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vs 칼뱅’,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니체 vs 바그너’, ‘하이데거 vs 레비나스등의 프레너미(frenemy) 시리즈를 출간한 출판사에 전화해 정약용 vs 듀이는 언제 나오는지 물었다. 곧 한 권이 출간되지만 내가 찾는 정약용 vs 듀이는 아직 일정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정약용 vs 듀이는 특별하다. 생전에 한 번도 시대를 공유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을, 그것도 우리나라 사상가와 서양 사상가를 프레너미 즉 경쟁자이자 친우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 사상가가 선학(先學)이고 우리나라 사람이 후학(後學)이라면 사숙(私淑) 관계일 수도 있겠지만 듀이가 후학인 정약용 vs 듀이란 파트너에 대해서는 동시대인이 아니라 해도 수렴되는 요소, 대립되는 요소가 섞여 있다는 말 정도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프레너미로 논할 사람들을 설정해보라고 스스로 과제를 부여한다. 물론 쉽지 않다. 방향이 불분명한 공부를 해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몽골 초원에 간 한국인들은 자신이 보기에는 계속 하늘과 땅만 있을 뿐 어떤 지형지물도 없는 곳에서 몽골인들이 지도도 네비게이션도 없이 방향을 잘 잡아 어김없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란다는 것이다.(91 페이지)

 

이는 저자(강미라)가 몸 도식(schema corporel)이란 개념을 설명하려고 든 실제 사례다. 몸 도식은 내 몸이 세계를 향해 내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어폐(語弊)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서경덕 vs 이지함을 생각해낸다. 어폐란 말을 한 것은 두 사람이 스승, 제자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스승 - 제자 프레너미도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 서경덕을 화담(花潭)보다 주역에서 기인한 복재(復齋: 地雷復)라는 호로 부르는 나는 송도(개성의 옛 이름) 3절이 박연폭포, 화담, 명월이라는 세 자연물이 아니었을까 한다는 글(이상국 지음 ’옛 사람들의 걷기 301 페이지)을 수용한다.

 

서경덕은 꽃피는 연못인 화담에서 호를 따왔고 황진이는 명월 즉 달에서 기생 이름을 따왔다.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송도의 세 가지 뛰어난 것으로 자신을 포함해 서경덕, 박연폭포를 거론했다고 하지만 훗날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었을 것이란 말이다.

 

() 자체가 아닌 기의 변화를 보았던 서경덕은 변화는 그저 바뀌는 것일 뿐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초연(담담했다고 해야 하나?)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 그의 삶은 놀이하듯 즐기는 (유유자적한, 처사다운) 삶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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