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연천 지질해설사 이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임금을 좋아하느냐, 효종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받았다. 나는 중종과 광해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답했고 효종은 사도세자처럼 무인(武人) 기질의 왕이었다는 말 정도를 했다.

 

조선은 마제석기(벼락도끼)를 기()가 굳어 생긴 것으로 인식했다. 최근 알게 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이익의 성호사설등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어서 과학적 측면에서 오류가 많다. 벼락도끼를 기가 굳어 생긴 것으로 본 것은 주자(朱子) 등의 송나라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다.

 

오늘 지구과학 공부를 하다가 지구인도 모르는 지구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 가운데 명종대왕을 반성케 한 지진이란 챕터는 꼭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이다. 명종의 아버지 중종의 경우 지진 공포에도 한밤중까지 회의를 진행했다. 16세기 전반에 최다 지진 발생 기록이 남았다. 1년에 8.7건이었다고 한다.

 

중종 재위 기간은 1506 1544, 인종 재위 기간은 1544 1545, 명종 재위 기간은 1545 1567년이다. 광해군(재위; 1608 - 1623)의 경우 궁궐 신축 공사 중 벼락을 맞고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 장소에서 드러난 벼락도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어떻든 어제 이야기한 중종과 광해군과 관련된 지구과학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있어 다행이다.

 

고고학자 이선복 교수는 우리는 예부터 인쇄술이나 측우기 등등의 높은 기술적 발전이 있었음에도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과학 발달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조셉 니덤의 견해가 생각난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제기된 바에 따르면 중국이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과학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관료제에 있다.

 

사물이 아닌 관계를 다루며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 양적 관계를 다루는 과학적 사고의 미비를 들 수 있겠다. 내가 공부한 것이 과학이라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을 기계적으로 암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된다. 물론 이해에 바탕한 암기도 많이 지향했다. 그럼에도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는 부족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반성 거리들은 이렇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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